항목 ID | GC0190312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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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忠州-對蒙抗爭-勝戰地-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충청북도 충주시 |
시대 | 고려/고려 후기 |
집필자 | 최일성 |
[개설]
고려의 대몽항쟁은 1231년(고종 18)부터 1273년(원종 14) 삼별초군의 패망에 이르는 40여 년이란 장구한 기간 동안 전개되었다. 1225년(고종 12) 몽고 사신 저고여(著古與)의 피살 사건을 계기로 국교가 단절된 뒤, 몽고는 1231년(고종 18) 조공 거절 및 저고여 피살에 대한 보복으로 고려에 대한 제1차 침입을 필두로 1254년까지 8차에 걸쳐 한반도 전역을 유린하였다. 이 시기 고려 백성의 생활은 비참해질 대로 비참해졌고, 고려왕조는 지배 체제가 무너짐으로써 한때나마 시련기를 맞게 되었다.
충주민은 1231년(고종 18) 12월 몽고군 침략으로부터 1258년(고종 45) 10월 박달현 전투까지 약 27년 동안 9차례의 전투를 모두 승리로 이끌어 충주를 대몽항쟁의 최대 승전지로 만들었다. 특히 충주에서는 백정·천민·노비들이 주체가 되어 몽고군과 용감하게 싸웠는데, 그 원인은 어디에 있을까. 충주 지역이 삼국시대 이래 그 어느 지역보다 시련이 많았던 지역임을 감안하면, 충주민의 자생적 지역 보위의 정신이 승화된 주인의식과 애국심의 발로일 것이다. 고려시대 충주민의 대몽항쟁의 전승을 기념하고 그 호국정신을 이어받기 위하여 2003년 9월 24일 대몽항쟁전승기념탑이 충주시 안림동 마즈막재에 세워졌다.
[제1차 승전, 충주성 전투]
살례탑(撒禮塔)이 이끄는 몽고군은 압록강 하구의 함신진(咸新鎭)[의주]을 통하여 철주·곽주·안북부·서경(西京)[평양]을 지나 황주·봉주 지역에 당도하여 황주의 동선역에 주둔하였다. 고려군은 동선역에서 처음 몽고군과 전투를 하여 방어하였고, 이어 평안북도 안주로 진격하여 안북성에서 살례탑의 주력 부대를 맞아 싸웠으나 괴멸되었다. 이것이 고려 중앙군의 마지막 전투가 되고 말았다.
살례탑은 안북부에 주둔하면서 부대를 나누어 남하시키고 몽고군은 개성 교외에 주둔하여 흥왕사를 침공하는 등 노략이 계속되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고려 정부는 적극적인 화의를 모색하여 왕족 회안공(淮安公) 왕정(王挺)을 안북부에 있는 살례탑에게 파견하여 화의를 청하였고, 동시에 몽고 지휘관들에게 막대한 물건을 주어 화의 체결에 부심하였다. 이러한 가운데도 개경에 와 있던 몽고군의 일부는 남쪽으로 계속 진격하여 충주까지 당도했는데, 그들이 지나간 곳에는 파괴와 학살이 자행되지 않은 곳이 없었다.
충주에서는 이미 몽고군 침입을 대비하고 있었다. 충주부사 우종주(于宗柱)는 양반별초를 거느리고 충주판관 유홍익(庾洪翼)은 노군·잡류별초를 거느리면서 대비하고 있었다. 그러나 막상 몽고군이 충주에 들이닥치자 우종주·유홍익, 양반별초는 모두 달아나고 노군·잡류별초만이 남아 온 힘을 다해 몽고군을 물리치는데 성공했다. 노군은 관청에서 사역하는 공노비를 주축으로 임시 무장시킨 부대로 생각되며, 잡류는 관청에서 잡역에 종사하는 지방민이라고 생각된다.
이때 충주민이 사수한 충주성 전투의 성과는 순수한 피지배 계급인 지역민이 용감히 싸워 이긴 승리이며, 이 승리로 몽고의 제1차 침략군은 충주 이남으로 진격하지 못한 것에 큰 의의가 있다고 보겠다. 충주민의 몽고군과의 첫 싸움에서의 승리는 충주민에게 자신감을 심어주었을 것이며 이후 대몽항쟁에서 승리하는 데 큰 작용을 했다고 본다. 또한 몽고군을 물리친 주축이었던 노군·잡류별초는 이후 몽고와의 항쟁에서 주축이 되었다.
[제2차 승전, 최수의 금당협 전투]
야굴(也窟)에 의한 몽고의 제5차 침입이 개시된 것은 1253년(고종 40) 7월이었다. 1252년(고종 39) 다가(多可) 등의 몽고 사신이 고려 측의 태도에 불만을 가지고 돌아간 직후 강화도에 있는 고려 정부는 전국 각처의 산성에 방호별감을 분견하는 조치를 취했고, 1252년 8월에는 충실도감(充實都監)을 설치하고 한인 백정을 검열, 각 영의 군대를 보충하게 함으로써 일전을 불사할 태세를 갖추었다. 이에 몽고는 야굴에게 고려 정벌의 명령을 내렸다.
야굴의 군대는 1253년(고종 40) 9월에 충주 지방에 또다시 침입했다. 이때 충주의 창정(倉正) 최수(崔守)가 금당협에 매복하고 있다가 몽고 군사 15급을 베고 병기와 포로 남녀 2백여 명을 빼앗았다. 이 공으로 최수는 대정(隊正)에 제수되었다. 금당협이 어디인지는 정확히 밝혀진 바 없지만, 당시 공을 세운 최수의 직이 향직인 창정이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금당협 전투 역시 지방민의 항전에 따른 승리였다고 하겠다.
[제3차 승전, 충주산성의 대몽항쟁]
1253년(고종 40) 10월 몽고 군사는 양근성(陽根城)을 포위하여 방호별감 윤춘의 항복을 받고 벼를 베어 군량을 준비하고 원주성을 포위·공격하였다. 한편 이현(李峴)은 몽고 군사와 더불어 천룡산을 치니, 황려(黃驪, 현 여주)현령 정신단(鄭臣旦)과 방호별감 조방언(趙邦彦)이 항복하였다. 천룡산성(天龍山城)[충주시 노은면 보련산에 있는 보련산성]에서도 경기도 여주민이 입보하고 있다가 이현에게 항복했다.
몽고군은 곧바로 충주를 포위·공격했다. 이때 몽고군은 야굴이 이끌던 몽고군의 주력 부대로 추측된다. 또한 항복한 백성들도 충주성을 치는 데 합세하였고, 전소경(前少卿) 정수(鄭壽)가 자기의 두 아들을 데리고 경산부(경북 성주)에서 와 항복하는 등 몽고군의 사기는 높아졌다. 이 당시 몽고군의 진영은 아모간, 반역자 홍복원, 이현 등의 장수가 이끌었고, 한편 충주에서는 충주산성 방호별감 낭장 김윤후의 지휘에 따라 충주산성에서 적의 공격을 방어하였다.
몽고군에 의하여 포위를 당한 충주산성은 몽고군의 공격을 받은 지 70여 일이나 되어 군량이 거의 다 떨어지게 되었다. 방호별감 낭장 김윤후가 군사들을 타일러 격려하기를 만일 죽음을 다하여 싸운다면 귀천 없이 모두 관작을 제수하겠다며 관노의 문부를 불태워 믿음을 보이고 노획한 마소를 나누어 주자, 사람들이 모두 죽기를 맹세하여 싸웠다. 이에 몽고군의 사기가 차츰 꺾이어 다시는 남쪽으로 내려가지 못하였다.
이렇듯 충주민이 70여 일이나 강력한 몽고 야굴의 주력 부대를 방어하는 데 성공한 것은 김윤후의 뛰어난 지휘력과 노비들의 신분 해방에 대한 갈구와 희망으로 목숨을 아끼지 않고 싸운 결과라 할 것이다. 충주산성 전투의 승리로 몽고군은 더 이상 남쪽으로 진격하지 못했기 때문에 충주 남쪽은 몽고군의 피해가 없었다.
이 같은 승리의 공으로 다음 해인 1354년(고종 41) 2월에 충주산성 별감 낭장 김윤후는 감문위섭상장군으로 승진되고, 전공이 있는 관료와 백정도 차등 있게 벼슬을 주었다. 또 4월에는 충주를 승격하여 국원경(國原京)으로 만들었다.
이렇듯 대몽항전에서 고려가 거둔 최대의 승전지인 충주산성이 어느 곳의 성인지 지금까지도 학계의 논란이 되고 있다. 최근 대몽항쟁 시의 충주산성을 충주읍성으로부터 4㎞ 지점에 위치한 대림산성으로 비정하는 주장이 힘을 얻고 있다.
[제4차 승전, 다인철소민의 대몽항전]
1254년(고종 41) 7월 몽고군은 차라대(車羅大) 휘하의 여속독(余速禿)과 보파대(甫波大) 등의 여러 장수와 영녕공(永寧公) 및 홍복원을 대동하고 군사 5.000명을 이끌고 고려에 내침하였다. 차라대의 본군은 개경·양평·여주·이천·안성을 거처 남진하다가 1254년(고종 41) 8월 하순 무렵 진천에서 임연(林衍)이 지휘한 진천민들에 의해 격퇴 당하고, 충주의 서쪽 다인철소에서도 격퇴 당하였다. 몽고군은 9월 중순 충주산성을 공격하였으나 고려군의 완강한 저항으로 공격을 포기한 채 경상도 지방으로 진출하였으나 상주산성 공격에서 대패하고 진주 지역까지 내려갔다가 이듬해인 1255년(고종 42) 2월에 철수했다.
1254년(고종 41) 9월 초순 차라대가 지휘하던 몽고군은 제철 기술자와 철과 무기류의 공급을 확보하고자 다인철소민이 입보하고 있던 유학산성을 공격했을 것이다. 다인철소민은 철광석과 제련 도구 및 제련된 철괴(鐵塊) 그리고 무기나 도구 시설 등을 적에게 빼앗기지 않기 위하여 유학산성에서 피난하다가 몽고군이 산성을 공격하자, 다인철소의 향리를 맡고 있던 지씨(池氏)와 어씨(魚氏)의 지휘 하에 일치단결하여 적을 격퇴시켰을 것이다.
『고려사(高麗史)』지리지 충주목조에 “고종 42년 다인철소 사람들이 몽고병을 방어한 공이 있어 소(所)를 현(縣)으로 승격하였다.” 라는 간단한 기록을 통해서는 다인철소민의 대몽항전 승리에 대한 모든 것을 밝히기는 대단히 힘든 일이다. 다인철소는 1255년(고종 42) 몽고군을 방어한 공으로 익안현으로 승격되었으며 조선 초기에 충주에 예속되었다가 조선 중기에 이안면으로 그 명칭이 바뀌었으며, 1914년 군·면 폐합에 따라 유등면(柳等面)과 합쳐져 이류면[현 대소원면]이 되었다. 그러므로 지금 대소원면의 대소리, 금곡리, 장성리, 검단리, 완오리, 본리, 영평리가 고려시대 다인철소 지역이다. 고려시대 다인철소는 규모, 생산, 품질, 기술면에 있어 당시의 대표적인 철소라 할 수 있다.
다인철소민이 몽고군을 격퇴한 전승지로 추정되는 유학산성은 충청북도 충주시 대소원면 장성리 산 18-1번지와 대소원면 금곡리 산 16번지 유학산[해발 396m] 정상 8부 능선 상에 위치한다. 유학산성은 퇴뫼식 산성이며 남쪽, 동쪽, 북쪽만 돌로 쌓은 석성으로 성의 길이는 약 230m이다. 서쪽은 자연 지세를 그대로 이용하고 있다. 많은 부분의 성벽이 무너져 있으며, 남쪽 능선 상에 높이 125㎝, 길이 2m의 석축 정도만이 남아 있다. 석축 안쪽으로는 너비 6m, 길이 25m의 회곽도가 남아 있다. 북쪽 능선 상의 성벽은 2중으로 축성한 것으로 보이며, 회곽도 일부 남아 있다. 동쪽은 축성한 것으로 보이는 돌들이 원위치에 박혀 있어 최초에 축성한 위치를 알 수 있다. 산성 주변으로는 성벽에서 무너져 내린 많은 돌들이 흩어져 있다.
[제5차 승전, 충주산성 전투]
1254년(고종 41) 충주에 침입한 몽고군이 충주에서 패전하고 물러간 뒤 7월에 차라대(車羅大)가 이끄는 몽고군이 침입하여 평안도와 황해도를 거쳐 개경을 취한 뒤 경기도와 충청도로 진출했으며, 그 선봉은 경상도에 이르렀다. 8월 20일 몽고의 척후 기병대가 괴주성(지금의 괴산) 아래에 진을 치고 있을 때 산원(散員) 장자방(張子邦)이 별초를 거느리고 이를 격파했다. 9월 14일 차라대의 주력군이 충주산성을 공격했다. 때마침 폭풍우가 몰아치는 가운데 성안에서 정예병을 편성하여 공격하니 적은 포위를 풀고 남쪽으로 내려갔다. 차라대는 남쪽으로 내려가 10월에 상주산성을 공격했으나 황령사(黃嶺寺)의 승려 홍지(洪之)가 적의 넷째 관원을 사살하는 등, 몽고군이 반수 이상 죽게 되자 포위를 풀고 물러갔다. 이후 몽고군은 각지를 유린하고 이듬해 돌아갔다. 1254년 몽골군에 사로잡힌 남녀가 무려 20만 6800명이요, 살육된 자도 헤아릴 수 없었으며 몽고군이 지나가는 주군(州郡)마다 잿더미가 되었으니 몽고군이 침입한 이래 피해가 가장 심했다. 충주는 몽고군을 격퇴하여 다행히 별다른 피해가 없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제6차 승전, 충주주성 전투]
1256년(고종 43) 4월 29일 몽고군은 충주를 함락하고 경상도 지방으로 진출하여 전쟁을 승리로 이끌고자 충주주성을 공격하였다. 충주민은 평지인 충주성에서 몽고군을 맞이하여 싸움을 하는 것은 불리하다고 판단하여 노약자를 미리 충주 인근의 월악산성으로 피난시켰다. 몽고군은 텅빈 충주주성을 점령하고 도륙하였다. 굳이 말한다면 충주민이 몽고군에 주성을 내주고 패배한 전투라고 할 수 있겠지만, 충주민은 이미 천험의 요새인 월악산성으로 피난하였기 때문에 작전상 충주주성을 몽고군에게 내어준 것으로 볼 수 있다.
[제7차 승전, 월악산성 전투]
1256년(고종 43) 4월 몽고군이 충주로 들어와 산성을 치니 관리와 노약자들은 겁이 나서 항거하지 못하고 월악산 신사로 올라갔다. 이때 갑자기 구름과 안개가 끼면서 바람이 불고 비가 내리며 뇌성이 들리고 우박이 쏟아지니, 몽고군은 산신령의 도움이 있다 하여 공격을 하지 못하고 물러갔다. 여기에 기록된 산성이 어느 산성인지는 확실히 알 수 없으나 월악산 신사로 올라갔다는 기록으로 보아 월악산에 있는 덕주산성으로 보인다.
[제8차 승전, 대원령 전투]
1255년(고종 42) 10월 2일 몽고군이 대원령을 넘어오자 충주에서 정예병을 출동시켜 몽고군 1,000여 명을 격살했다. 이는 몽고군이 남쪽을 석권하고 북으로 돌아가는 길에 대원령을 넘었던 상황으로 보인다. 대원령은 삼국시대 계립령으로 지금의 수안보면 미륵리에서 문경으로 넘어가는 하늘재이다. 대원령은 군사적 요충지였다.
[제9차 승전, 박달현 전투]
1258년(고종 45) 10월에도 몽고군이 충주 지역에 출몰하니 충주 별초가 박달현에 매복하고 있다가 몽고군을 저격하여 사로 잡혔던 사람, 소·말, 병기를 탈환하였다. 이 전투 상황도 간략하게 기록되어 자세히는 알 수 없으나 충주민으로 구성된 별초가 박달재의 험로를 이용하여 승리한 전투로 보인다.
[충주민의 자생적 지역 보위 정신의 산물]
40여 년 간의 몽고군 침략은 고려의 농촌 생활을 비참하게 만들었고, 끝내는 고려 자신의 지배 체제가 한때나마 자주성이 상실된 결과를 가져온 전쟁이었다. 당시 충주는 몽고의 침입이 개시되는 1231년(고종 18)부터 전쟁이 사실상 끝날 때인 1258년(고종 45)까지 지속적인 항쟁이 전개된 특별한 지역이다. 충주가 이처럼 고려의 대몽항쟁에서 가장 치열한 전투 지역으로 등장하게 된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다.
첫째, 충주민의 투철한 항쟁 정신이다. 이러한 항쟁 정신이 어디에 연유하는가는 차후 연구의 과제가 될 것이다. 둘째, 충주가 갖는 전략적 중요성, 곧 교통의 중심지이기 때문이다. 충주는 서울과 지방을 연결하는 수륙 양면의 내륙 교통의 요지이고 특히 경상도로 가는 동맥 상에 위치한다. 셋째, 충주가 갖는 군수 상의 중요성과 관련이 있다. 충주는 당시 고려의 대표적 철 생산지였다. 철은 생활 도구 이외에 각종 무기류 제작에 있어서 극히 중요한 재료였던 것이다. 넷째, 항쟁의 주체 세력이 백정과 노군·잡류, 천민 등이었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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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주 지역에서의 대몽항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