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목차

『여지도서』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700246
한자 輿地圖書
분야 지리/인문 지리,문화유산/기록 유산
유형 문헌/전적
지역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이성임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지리지
권책 55책
저술 시기/일시 1757년~1765년연표보기 - 『여지도서』 편찬
소장처 한국 교회사 연구소 - 서울특별시 중구 삼일대로 330

[정의]

1757년~1765년에 조선 전국 읍지를 모아 만든 현재의 인천광역시 미추홀구를 포함한 전국 읍지.

[편찬/간행 경위]

『여지도서(輿地圖書)』는 1757년(영조 33)부터 1765년에 걸쳐 조선의 각 읍에서 편찬한 읍지를 모아 성책(成冊)한 전국 읍지(邑誌)이다. 총 55책으로 295개의 읍지와 17개의 영지(營誌) 및 1개의 진지(鎭誌) 등 총 313개의 지지가 수록되어 있다.

1757년(영조23) 홍양한(洪良漢)이 임금에게 아뢴 것이 계기가 되어, 전국 각지에 읍지를 중앙으로 올려 보내도록 명이 내려졌다. 수록된 읍지의 호구 관련 내용이 1759년을 기준으로 하고 있는 점을 볼 때 읍지들은 1760년 이후에 수집된 것이라 생각된다.

『여지도서』의 제작은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등으로 이어지는 조선 시대 전국적인 관찬(官撰)[관청에서 서적을 편찬함] 지리지 제작의 선상에서 이루어진 것이라 할 수 있다.

[형태/서지]

『여지도서』는 총 55책의 필사본이다. 한국 교회사 연구소 소장본이다.

[구성/내용]

『여지도서』는 『동국여지승람』을 기초로 하면서 방리, 제언, 도로, 전결, 군병 등의 항목이 첨가되어 사회·경제적인 내용이 강화되었다. 이러한 체제는 16세기 후반 이래 대두된 새로운 읍지 편찬의 경향을 정리하고 종합한 것으로 18세기 읍지의 종합적 성격을 대표하고 있다.

특히 『여지도서』는 조세 수취와 관련된 진공, 조적, 전세, 대동, 균세, 봉름 등이 각각 독립 항목으로 설정되는 변화가 보이는데, 이는 조세 액수의 정확한 파악이 당시 국가적으로 중요한 과제였음이 드러나는 대목이라 할 수 있다. 한편 『여지도서』에는 각 읍별로 채색 지도가 포함되어 있다.

현재의 인천광역시 미추홀구에 위치했던 읍치를 중심으로 한 인천도호부의 읍지의 구성 항목은 『여지도서』의 일반적 항목과 같다. 방리(坊里), 도로(道路), 총서(總敍), 건치 연혁(建置沿革), 군명(郡名), 형승(形勝), 성지(城池), 관직(官職), 산천(山川), 성씨(姓氏), 풍속(風俗), 단묘(壇廟), 공해(公廨), 제언(堤堰), 창고(倉庫), 물산(物産), 교량(橋梁), 역원(驛院), 목장(牧場), 관애(關阨), 봉수(烽燧), 누정(樓亭), 사찰(寺刹), 고적(古跡), 진보(鎭堡), 인물(人物), 한전(旱田), 수전(水田), 진공(進貢), 조적(糶糴), 전세(田稅), 대동(大同), 균세(均稅), 봉름(俸廩), 군병(軍兵)으로 구분되어 있다. 또한 읍지 앞에는 읍치를 중심으로 하여 그린 인천도호부의 채색 지도도 수록되어 있다.

현재의 인천광역시 미추홀구와 관련된 『여지도서』의 주요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방리’ 조에 따르면 인천도호부는 총 10개 면으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현재 인천광역시 미추홀구에 위치해 있는 관아를 중심으로 하여 부내면이 있었다. 부내면의 당시 호수는 335호, 인구는 성인 남자 435명, 성인 여자 506명이었다. 또한 문학산에는 봉수가 있었음도 기록되어 있다. 문학산 봉수는 남쪽으로 안산의 정왕산 봉수의 신호를 받아서 북쪽 부평의 유곶 봉수로 신호를 보냈다고 한다.

[의의와 평가]

『여지도서』는 18세기 조선 사회에 대한 전국적인 정보를 제공해 주는 중요한 자료로서, 인천 지역의 상황을 살피는 데에 필수적인 다양한 내용을 담고 있다.

[참고문헌]
등록된 의견 내용이 없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