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70174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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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칭/별칭 | 「용탕 소리」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구비 전승,문화유산/무형 유산 |
유형 | 작품/민요와 무가 |
지역 |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
집필자 | 남동걸 |
[정의]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등지의 염전에서 일했던 염부들이 바닷물을 염전으로 퍼 올리면서 불렀던 노동요.
[개설]
1907년부터 지금의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주안동 등지에 우리나라 최초로 근대식 천일염전이 생겼다. 천일염을 생산하는 방법은 일기가 좋은 날 물박이라고도 하는 용탕으로 맞두레질을 하여 염전에 물을 댄 후 햇볕에 수분이 증발되면서 소금의 결정체가 생길 때까지 기다렸다가 흰색의 소금 결정체가 보이면 밀대로 소금을 밀어서 한 곳에 모아놓고 수확을 하는 것이다. 「물푸기 노래」는 「용탕 소리」라고도 하는데 네 사람이 한 조가 되어 용탕으로 맞두레질을 하여 염전에 물을 대는, 즉 용탕질을 할 때 부르는 노래이다.
[채록/수집 상황]
인천 문화원에서 2001년 펴낸 『인천의 생활 민속』 318~320쪽에 가사가 수록되어 있고, 이선주의 『한국의 민요』 159~160쪽에도 1973년 최희석에게 채록한 비슷한 가사가 「용탕 소리」라는 제목으로 악보와 같이 수록되어 있다.
[구성 및 형식]
「물푸기 노래」는 네 사람이 한 조가 되어 용탕질을 할 때 부르는 노래로 받는 소리와 메기는 소리로 구성되어 있다. 물레[수차]질을 할 때도 「물푸기 노래」를 불렀으나 물레질을 할 때는 “두레야 칭칭 당겨라.”가 “물레야 핑핑 돌아라.”로 바뀌어 불린다.
[내용]
두레야 칭칭 당겨라/물 넘어 갑니다//강산에 청산에 가자/나의 갈 길 어드메냐//두레야 칭칭 당겨라/물 넘어갑니다//염밭 찾아 이 고생이/이내 팔자 어디 다 가고//두레야 칭칭 당겨라/물 넘어 갑니다//구만리같은 이 청춘/간끼 절어 늙어가네//두레야 칭칭 당겨라/물 넘어 갑니다//이내 몸이 어기지니/덩어리 소금 먹짜뵈니//두레야 칭칭 당겨라/물 넘어 갑니다//백옥처럼 흰 소금이/허어야 씨구 어허씨구//하나요 하나로구나/한평생 좋은 세월 어디 다 가버리구//둘이요 둘이로구나/두손이 젓갈이 되도록 소금섬을 부여잡았네/셋이요 셋이로구나/섰으나 앉으나 장탄식이요*)//넷이요 넷이로구나/ 네놈의 꾐이냐 네놈의 우둔이냐//다석이요 다섯이로구나/다소간에 식솔들을 떼어놓고//여섯이요 여섯이로구나/염밭에 찾아들어 이 고생이 웬말이냐//일곱이요 일곱이로구나/일가친척 고보지고 일가친척 보고지고//여덟이요 여덟이로구나/팔팔한 세월에 반여든 되었구나//아홉이요 아홉이로구나/구만리 같은 우리 청춘 허송세월 하지 말고//열이요 열이로구나/열심히 일하여 만금쥐고 귀향하세//
*) 『인천의 생활민속』에는 이 부분이 ‘넷이요 넷이로구나’ 다음에 나오는 부분인 ‘네놈의 꾐이냐 네놈의 우둔이냐’와 같은 가사로 되어 있다. 하지만 비슷한 가사로 구성되어 있는 『한국의 민요』에서는 ‘섰으나 앉으나 장탄식이요’로 되어 있어, 이것으로 대체했다.
[현황]
1968년 이후 주안 염전이 모두 없어진 관계로 현재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일원에서 「물푸기 노래」는 전승이 중단된 상태이다.
[의의와 평가]
1910년 후반부터 1960년대까지 약 50년 동안 인천은 소금의 산지로 전국에 널리 알려져 있었다. 그래서 인천의 특산물로 소금을 가장 먼저 꼽았을 정도로 인천과 소금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 중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지역에 있었던 주안 염전은 우리나라 근대식 염전의 효시로 알려진 곳이기에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주안 염전에서 용탕질할 때 불린 염전요의 일종인 「물푸기 노래」는 주안 염전의 당시 모습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