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90188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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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薛公瓒傳 |
이칭/별칭 | 「설공찬환혼전(薛公瓚 還魂傳)」,「설공찬이」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 |
유형 | 작품/문학 작품 |
지역 | 전라북도 순창군 |
시대 | 조선/조선 전기,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이복규 |
저자 생년 시기/일시 | 1449년 - 채수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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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기 사항 시기/일시 | 1511년 - 『조선왕조실록』에 「설공찬전」 최초 언급 |
저자 몰년 시기/일시 | 1515년 - 채수 사망 |
배경 지역 | 전라북도 순창군 |
성격 | 소설 |
작가 | 채수[1449~1515] |
[정의]
전라북도 순창군을 배경으로 하여 조선 전기의 문신 채수가 지은 고전 소설.
[개설]
「설공찬전(薛公瓒傳)」은 조선 전기의 문신 채수(蔡壽)[1449~1515]의 소설로, 저승에서 혼령이 돌아와 남의 몸에 들어가 저승 소식을 전해 준다는 내용이다. 원래는 한문으로 지어졌으나, 한문본은 전하지 않고 국문본은 후반부가 낙질된 채 13쪽까지만 남아 있다.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에 의하면 「설공찬전」은 당시에 한문과 국문으로 광범위하게 읽혔는데, 윤회 화복(輪廻禍福)을 다루어 백성을 미혹한다는 이유로 조정에서 문제 삼아 수거되어 불태워지고 채수는 파직되었다. 이른바 필화 사건을 일으킨 작품이다.
[내용]
전라북도 순창 지역에 살던 설충란에게는 남매가 있었는데, 딸은 결혼하여 바로 죽고 아들 설공찬도 장가들기 전에 병들어 죽는다. 어느 날 설충란의 동생 설충수의 집에 설공찬 누이의 귀신이 나타나 설충수의 아들 설공침에게 들어가 병들게 만든다. 설충수가 주술사인 김석산을 불러다 귀신을 퇴치하려 하자, 동생 설공찬을 데려오겠다며 물러간다. 그 말대로 설공찬의 혼령이 와서 사촌 동생 설공침에게 들어가 수시로 왕래한다. 설충수가 김석산을 불러다 설공찬을 물리치려 하자 설공침을 극도로 괴롭게 하며 반발한다.
어느 날 설공찬이 사촌 동생과 윤자신을 불러오게 하였고, 이들이 설공찬에게 저승 소식을 묻자 일러 준다. 저승의 위치는 바닷가인데, 순창에서 40리[15.71㎞] 거리이며 국호는 단월국, 저승 임금의 이름은 비사문천왕이다. 저승에 간 영혼들 가운데 이승에서 선하게 산 사람은 저승에서도 잘 지내나 악하게 산 사람은 고생하며 지내거나 지옥으로 떨어진다. 이승에서 임금 노릇을 하였다 하더라도 반역하여 왕권을 차지한 사람은 지옥에 떨어지며, 특히 저승에서는 여자라도 글만 잘하면 쓰임을 받는다. 성화 황제의 신하가 저승에 가게 되자 1년만 연기해 달라고 사람을 시켜 저승 임금인 염라왕에게 요청하나 허락하지 않는다. 이에 성화 황제가 직접 염라국을 방문하자 염라왕은 그 신하를 잡아 오게 해 손을 삶으라고 한다.
[특징]
「설공찬전」은 저승 경험담 가운데 하나이다. 다른 저승 경험담에서는 이를 꿈속의 일로 돌리거나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나서 진술하는 것으로 처리하는 데 비해, 혼령이 다른 사람의 몸에 들어가 그 입을 빌려 말한다는 점에서 특이하다. 등장인물인 설충란, 설충수, 설공침 등이 족보에 실려 있고, 설충란의 묘가 전라북도 순창군 금과면 동전리 석촌에, 설충수의 묘가 동전리 앞 평산에 각각 전하고 있어 순창 지역과 관련이 깊은 작품이다. 더욱이 작자인 채수와 설충란은 인척 관계여서 실화를 바탕으로 지어졌을 가능성이 크다. 우리 무속에서의 빙의(憑依) 또는 공수 현상[무당이 신이 내려 신의 소리를 내는 일]처럼 설충란 집안에서 이와 유사한 일이 발생하였고, 그 이야기를 들은 채수가 자신의 상상력을 보태 지어낸 것이 「설공찬전」이라고 여겨진다.
[의의와 평가]
「설공찬전」은 김시습(金時習)의 「금오신화(金鰲新話)」에 이어 등장한 소설로서, 「금오신화」와 신광한(申光漢)의 『기재 기이(企齋記異)』 사이의 공백을 메워 주는 작품이다. 당시에 국문으로도 번역되어 읽혔다.
「설공찬전」 국문본의 발견은 최초의 한글[국문] 소설 문제를 야기하기도 했는데, 좁은 의미의 한글 소설의 개념에 비추어 보면 원작이 한문이므로 한문 소설이지 한글 소설은 아니다. 다만 「설공찬전」 국문본의 경우, 한글로 읽혀진 최초의 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한문본은 민중이 향유할 수 없으나, 「설공찬전」은 당시에 국문으로도 번역되었기에 비로소 일반 백성이 소설을 향유할 수 있었던 첫 사례이므로 국문본은 소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국문본이 존재해 파급 효과가 더욱 크다고 판단하여 조정이 더욱 예민하게 반응한 것으로도 보이기 때문에, 한글로 적히거나 읽혀지는 소설의 사회적인 영향력이 어떠한지 확인하게 하는 사례이기도 하다. 만약 이때 「설공찬전」이 탄압받지 않았다면 원작이 한글인 최초 한글 소설의 등장은 훨씬 앞당겨졌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