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목차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3200033
한자 改新敎
영어음역 Gaesingyo
영어의미역 Protestantism
분야 종교/기독교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개관)
지역 경상북도 김천시
시대 근대/근대,현대/현대
집필자 송호상

[정의]

경상북도 김천시에서 활동하고 있는 그리스도교의 한 분파.

[개설]

김천 지역은 선교사들의 선교 지역 분할 협정인 교계예양(敎界禮讓)을 통해 미국 북장로교회의 주된 선교 지역이었다. 따라서 김천 지역의 개신교회도 장로교를 중심으로 발달하였으며 다른 교단의 교회는 상대적으로 미약한 형편이다.

[장로교회]

김천 지역의 장로교회로서 처음 세워진 것은 1901년의 송천교회였다. 송천교회는 미국 선교사 부해리(傅海利)[Bruen, Henry Munro, 1874~1957]가 직접 전도하여 세운 교회이다. 부해리 목사는 미국 북장로교 선교부 소속의 선교사로서 1899년 9월부터 1941년까지 42년간을 대구를 중심으로 경상북도 지역에서 선교 활동을 전개하였다. 선산·김천·칠곡·고령·달성·상주 등 경상북도 서북부 지역에서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면서 많은 교회의 설립에 직간접적으로 참여하였다. 그 가운데서도 선교 전략상 거점이 김천이었다.

1901년 설립 당시 송천교회의 초대 교인으로는 조사(助事) 방명원(方明圓)과 교회 내 양성학교(養性學校) 교사를 지낸 김중근, 이재욱 등이었다. 이 가운데 조사 방명원은 경상북도 청도 출신으로서 일제 강점기 독립 운동가였던 최재화를 중심으로 조직된 비밀 결사 혜성단(慧星團)의 활동을 지원하면서, 4월 18일 밤 자신의 집에서 「근고 동포(謹告同胞)」라는 경고문(警告文)을 기초하게 하고 뒤이어 27일 「경고아동포(警告我同胞)」라는 전단을 만들게 하였다. 이처럼 방명원 장로는 대구 인근 지역 독립 운동의 후원인(後援人)으로 큰 역할을 한 인물이다.

이후 송천교회에서 분리되어 설립된 교회로는 덕계교회, 황금동교회 등이 있다. 이 가운데 황금동교회는 김천 시내에서 최초로 설립된 교회이다. 부해리 목사가 1901년 아포에 송천교회를 설립하여 전도하던 중 1903년 추풍령 김천덕계 대원교회를 분립시킬 때 박상순을 중심으로 김천시 황금동 183번지의 주택을 매입하여 설립되었다. 황금동교회는 김천 지역의 3·1운동을 주도한 중심 교회였다. 조사 김충한, 장로 최용수, 교인 주남태·김원배·차경곤·김재위 등이 만세 시위를 계획했으나 사전에 발각되어 체포, 투옥되기도 하였다.

황금동교회는 1922년 현재의 황금동 40번지에 132㎡의 예배당을 신축하였다. 1950년 6·25전쟁으로 인하여 예배당이 소실되어 다시 건축되었고 1987년에는 현재의 새 예배당이 건축되었다. 또한 황금동교회는 진보적인 신학자들이 시무한 곳이며 일제 강점기 말에는 송창근 목사, 정대위 목사, 윤보선 전 대통령의 부인 공덕귀 여사 등이 시무한 교회이다.

김천지좌교회황금동교회에 이어 두 번째로 생긴 교회이다. 황금동교회에 다니던 교인들 가운데 최인출 등이 모여 만든 교회로서 일제 강점기 말 황금동교회로 합류되기도 하였다. 이후 성장을 계속하여 1970년 지금의 교회당을 건축하였다.

평화동교회황금동교회의 내분으로 설립된 교회이다. 해방 후 교회가 급성장하는 가운데 1947년 일본 신사가 있던 김천 남산공원황금동교회를 신축하려고 모금 운동을 전개하는 과정에서 당시 시무하던 문재린 목사[문익환 목사의 부친]와 뜻이 맞지 않는 신자들이 이탈하여 1948년 11월에 평화동에 교회를 설립하였다.

이후 평화동교회 내부에서 정통 신학과 신(新)신학을 추구하는 세력 간의 논쟁이 이어지는 가운데 정통 신학을 고수하고자 한 보수파들이 1954년에 이탈하여 김천제일교회가 설립하였다. 1952년 대한예수교장로회 경북노회에서 김천·상주·선산 지역이 분리되어 경서노회가 창립되었으며 황금동교회, 김천지좌교회 등 29개 교회가 소속되어 있다.

[성결교회]

성결교회는 한국 개신교 3대 교단 중의 하나이며 경상북도 지역에서 성결교회가 처음 세워진 곳이 김천이다. 동양선교회에서 1914년 8월 경성성서학원 출신인 박제원 전도사를 주임으로 김준규를 부주임으로 파견하면서 현 남산성결교회의 모체인 김천전도관이 세워지게 되었다. 1915년에 예배당을 신축했으며 송곡리와 마전리에도 교회를 건립하였다. 1920년에는 교회를 현재의 남산동으로 옮겼다.

1935년 교세가 확장되어 개령면에 광천교회가 설립되었다. 이후 일제의 탄압으로 폐쇄되었던 교회가 해방 후 김천성결교회로 재건되었다. 1947년에는 다수동기도소가 다수성결교회로 되고 1949년에는 감문면에 태촌교회가 설립되었으며 1952년 김천성결교회에서 서부성결교회가 분립되었다. 이어 1954년에는 김천성결교회남산성결교회로 이름을 바꾸었다. 이후 김천 지역을 중심으로 성결교 경북서지방회가 조직되었으며 남산성결교회를 비롯한 21개 교회가 소속되어 있다.

[감리교]

감리교는 경상북도 지역이 주된 선교 지역이 아니었기에 그 교세가 약하다. 경상북도 지역에 감리교 선교사였던 아펜젤러가 1888년 여름 이 지역을 거쳐 간 이후 각 교파 간의 선교지 분할 규정[교계예양]으로 인해 감리교회는 설립되지 않았다. 그러나 해방 후 6·25전쟁을 전후한 시기에 김천에서 감리교회가 설립되기 시작하였다.

1950년 6월 20일 6·25전쟁 직전 적산가옥에 기독교대한감리회 김천교회라는 이름뿐인 교회가 생겨났다. 이후 전쟁 중 나운몽 장로를 중심으로 교회가 제 모습을 갖추었다. 그리고 1950년 8월 조병두를 중심으로 김천시 감문면 남곡동에 남곡감리교회가 설립되었다. 같은 해 9월에는 어모면 옥률동에 아천감리교회가 설립되었는데 9·28수복 후 나운몽 장로가 주축이 되어 피난민들과 함께 설립한 교회로 알려져 있다.

[용문산 기도원]

감리교회에서 활동하던 나운몽 장로가 6·25전쟁 시기 교계가 분열되는 상황 속에서 새로운 신앙 운동으로 전개한 것이 용문산기도원이다. 초기에는 기존의 개신교단에 속하고자 하였으나 주류 개신교에 의해 이단으로 정죄되면서 독자적 교단을 형성하게 되었다. 용문산기도원 운동의 기반이 된 것은 ‘애향숙(愛鄕塾)’이다. 1940년에 조직된 단체로서 ‘하나님사랑’ ‘땅사랑’ ‘민족사랑’의 구호를 내세우며 학생들을 교육하였던 일종의 기독교 농촌 계몽 단체였다. 일제는 이를 민족 운동 단체로 보고 6개월 만에 해산시켰다.

해방 후 나운몽은 애향숙을 재건하여 활동하던 중 전쟁을 겪은 뒤 방언, 예언, 환상 등을 동반하는 신비 체험을 하였다. 이후 나운몽이 주도하는 집회에서 병이 치유되거나 방언하는 사람들이 생겨났고 이를 계기로 본격적으로 집회를 개최하였다. 이때부터 용문산기도원이라는 말이 널리 알려지기 시작하였다.

나운몽은 기도원, 수도원, 고등성경학교 등을 설립하고 ‘수도사’를 양성하였다. 용문산기도원이 전국적으로 알려지는 계기는 문서 전도이다. 1960년부터 발행된 『복음신문』은 지금까지도 발행되고 있다. 그리고 용문산 중앙의 삼선봉에 구국 제단을 마련하고 한민족의 통일과 복음화를 위한 구국 기도를 전개하였다. 그런 가운데 교세가 확장되고 기도원에 주거 시설이 마련되자 일종의 신앙촌의 면모를 갖추기도 하였다.

나운몽은 전국 복음화 운동의 일환으로 ‘일동일교회(一洞一敎會)운동을 전개하여 전국에 수 백 개의 교회를 설립하였다. 이러한 교세 확장에 대해 기성 교단은 이단으로 규정하고 탄압하였다. 그런 가운데 박정희 정권의 새마을 운동이 전개되면서 교단에 속하지 않은 기도원에 대해 설립을 허가하지 않았다. 이에 용문산기도원은 1979년 전국의 소속 교회 311개를 중심으로 ‘대한예수교오순절성결회’라는 독자적 교단을 설립하였다.

나운몽은 『동방의 한나라』 등의 저서를 통해 기존 제도권 교회의 탈영성화에 대한 반작용으로 ‘한국적 영성’을 강조하고 있다. 즉 우리 민족이 약소민족으로서 당하는 정치적 수난에 대응하는 뜨거운 성령 운동과 보수적 신앙 등을 근거로 우리 민족이 새로운 시대의 선민임을 주장하고 있다. 2010년 5월 현재 약 200여 명이 상주하고 있다.

[구세군]

구세군교회는 1908년 10월 1일 한국에 처음 전래되었으며 김천 지역에 처음 교회를 개척한 것은 1917년의 일이다. 김상기에 의해 세워진 구세군 김천영문은 이후 별다른 활동을 하지 못한 채 폐쇄와 재개가 반복되다가 1956년에 이르러서야 본격적인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성옥 사관을 중심으로 김천시 남산동에서 가정 예배로 시작했으며, 다음해에 적산토지를 불하받아 평화동에서 교회를 신축하였다. 지금의 위치인 부곡동으로 옮긴 것은 1981년의 일이다. 2010년 11월 현재 신도 수는 50명이다. 1992년부터 구세군 어린이집을 운영해 2010년 11월 현재까지 540명의 원생을 배출하였다.

[현항]

2010년 현재 김천 지역에는 장로교회 151개소, 성결교회 15개소, 침례교회 8개소, 감리교회 5개소, 구세군교회 1개소가 있다.

[참고문헌]
등록된 의견 내용이 없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