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0000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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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歷史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역사/근현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개관) |
지역 | 경기도 포천시 |
집필자 | 여성구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757년 - 한산주 마홀군에서 한주 견성군으로 바뀌고, 내을매현과 양골현 또한 사천현과 동음현으로 각각 개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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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기 사항 시기/일시 | 923년 - 명지성 장군 성달이 아우 이달, 단림 등과 함께 고려에 귀부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173년 - 포주에 향교 설치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413년 - 포주가 포천현으로 개칭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674년 - 포천현 노비 전석이 상전을 살해하려고 함.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10년 09월 01일 - 영평 공립 보통 학교 개교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11년 09월 01일 - 포천 공립 보통 학교 개교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49년 06월 12일 - 북한군 약 200명의 병력이 포천시 일동면 사직리를 공격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896년 10월 - 포천현 내동 소학리에서 소작인과 마름 사이의 분쟁이 일어남 |
[정의]
한반도의 중심에 위치한 포천 지역의 선사 시대부터 현대까지의 역사 개관.
[선사 시대]
포천 지역은 한탄강을 따라 서북 지역 또는 한강 하류 지역과 연결되고, 추가령 지구대를 따라 동북쪽으로 주민의 이동로가 펼쳐져 있다. 사방으로 교차적인 위치에 있어서 문화적인 교류가 많았다는 것이 선사 시대의 문화상에서도 관찰되고 있다. 포천의 선사 문화는 한강의 상류 지역과 서해의 도서 지역, 동해안의 선사 문화들과 공통되는 점이 있다.
포천 지역은 구석기 시대부터 인류의 존재가 확인되었다. 구석기 시대 유적은 주로 한탄강·영평천·포천천 유역을 따라 분포하는데, 선사 시대 사람들이 수량이 풍부하고 평야 및 구릉지가 교차하는 곳에 주로 거주하였음을 알 수 있다. 한탄강 유역의 포천시 관인면 중리 문배뜰 유적·중리 늘거리 유적·중리 아랫심재 유적을 비롯하여 사정리 화적연 유적, 자일리 팔호 유적, 운천리 오호 유적 등은 임진강 유역의 전기 구석기와는 달리 후기 구석기 시대인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이밖에 포천천 유역의 포천시 신북면 금주리, 포천동 어룡리 유적, 영평천 유역의 영중면 양문리·성동리·신장리와 창수면 오가리 유적 등이 조사되었다. 유물로는 여러 면 석기[多角面圓球]·긁개·찍개·밀개·주먹 도끼 등이 출토되었으며, 중리 늘거리 유적에서는 흑요석으로 만든 석기를 포함하여 약 1만 2000점이 출토되어 연천 전곡리 유적과 비교할 수 있는 유적으로 평가받고 있다.
신석기 시대의 유적은 포천 영송리 선사 유적을 들 수 있다. 포천 영송리 선사 유적에서 빗살무늬 토기 조각이 수습되었고, 이 토기 조각들은 서해안 조개더미[貝塚]에서 발견되는 것과 유사하여 서해안 빗살무늬 토기인들이 임진강과 한탄강을 따라 내륙으로 유입되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포천시 관인면 중리 유적에서도 이와 유사한 모양의 빗살무늬 토기 조각이 나왔다. 포천 영송리 선사 유적에서는 청동기 시대와 철기 시대의 유구(遺構)도 발견되었다.
청동기 시대의 유적과 유물로는 고인돌, 청동 검, 간 돌도끼, 반달 칼, 민무늬 토기 등이 여러 곳에서 보고되었다. 고인돌은 포천시 창수면 추동리, 자작동, 일동면 수입리·사직리·기산리, 가산면 금현리·방축리, 소흘읍 송우리, 신북면 만세교리 등지에 산재해 있다. 이들 고인돌은 개석식과 탁자식이며, 작은 개울을 끼고 있는 낮은 구릉 끝에 위치한다는 특징을 보인다. 포천시 군내면 포천 종합 고등학교에서 마제 돌도끼와 마제 돌살촉이 출토되었다.
철기 시대의 유적으로는 포천시 관인면 중리 용수재울·영중면 영송리·포천 자작리 유적지 등에서 다수의 집 자리 유구와 함께 중도식 토기(中島式土器) 및 갈돌·갈판 등이 발견되었다. 포천 영송리 선사 유적에서 원삼국 시대에 해당되는 유구는 주거지 5기와 토기군 1개소가 발견되었다. 그 입지 조건 등으로 보아 초기 국가의 중요한 구성단위인 읍락의 성립과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보고 있다. 유적에서 출토된 긴 항아리형의 민무늬 토기들은 한강 유역에서 지속적으로 발견되고 있는 것으로 포천 지역이 한강 유역의 문화권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삼한 시대]
청동기 시대의 대표적인 묘제(墓制)인 고인돌의 분포와 양식을 볼 때, 포천 지역에는 서로 다른 성격의 두세 개 집단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포천시 창수면 추동리 고인돌과 가산면·일동면 일대 탁자식 고인돌은 그 묘제 주체가 다르며, 자작동 지석묘(自作洞支石墓)를 중심으로 한 포천 자작리 유적지(抱川自作里遺蹟地)에서 대형 움집터가 발굴되어 독자적인 집단이 존재하였음을 알 수 있다.
청동기 문화를 기반으로 한 이들 집단은 북방의 철기 문화와 기마 문화를 가진 이주 집단의 영향을 받아 기원을 전후한 시기에 연천 지역의 다른 집단과 하나의 세력을 형성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이 성읍 국가를 마한(馬韓) 54개 소국 가운데 하나인 원양국(爰襄國) 또는 상외국(桑外國)으로 비정되기도 한다. 기원후 3세기 무렵 마한 연맹체에 속한 포천 지역은 동쪽으로 철원 춘천 지방의 예족, 북쪽으로 낙랑군·대방군과 대치하면서 남쪽의 백제국의 세력 권역에 들어갔던 것으로 보인다.
[삼국 시대]
낙랑군과 대방군이 한반도에서 축출되는 313~314년 무렵, 이전 어느 시기엔가 백제의 지배하에 들어갔던 것으로 보인다. 백제의 북쪽 변경 지대라고 할 수 있는 연천, 포천 지역은 소멸한 한 군현에 대신하여 고구려 세력이 백제와 대치하는 접전 지역으로 바뀌었다. 포천 지역에는 백제 초기의 성을 개축한 포천 고모리 산성(抱川古毛里山城)·성동리 산성(城東里山城)·고소성(姑蘇城)·대전리 산성(大田里山城) 등 옛 성터가 있어 당시 이 지역의 군사적 중요성을 보여 준다.
4세기 후반 고구려 광개토대왕이 즉위하면서 고구려와 백제의 전투는 본격적으로 전개되었다. 고구려는 백제로부터 임진강과 한강 유역의 58개 성과 700개의 촌을 빼앗았다. 이들 가운데 미사성은 포천 관내에 있었던 대전리 산성의 백제 때 명칭이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고모루성(古牟婁城)은 고모리 산성에 비정되고 있다. 장수왕[재위 413~491]의 한성 함락 이후 마홀군(馬忽郡)·내을매현(內乙買縣)·양골현(梁骨顯) 등의 행정 구역으로 개편되었다.
6세기 초반 안원왕[재위 531~545]이 즉위하면서 고구려는 극심한 정쟁에 휩싸이게 되었고, 국가 체제를 정비한 백제 성왕과 신라 진흥왕의 동맹군에 의해 한강 하류 유역을 빼앗겼다. 이때 마홀군은 신라의 신주의 관할에 놓이게 되었다.
[남북국 시대]
신라의 삼국 통일 과정에서 매소성이 주목되고 있다. 그 이유는 신라가 당나라 군과의 매소성 전투에서 승리함으로써 나당 전쟁을 종식하고 불완전하나 삼국 통일을 이루었기 때문이다. 매소성은 최근에 연천군에 편입된 청산면 대전리의 대전리 산성일 것이라는 추정이 있다.
757년(경덕왕 16) 한산주[신주의 후신] 마홀군에서 한주(漢州) 견성군(堅城郡)으로 바뀌고, 내을매현과 양골현 또한 사천현(沙川縣)과 동음현(洞陰縣)으로 각각 개칭되었다. 이후 예성강 이북 북방 경영이 진행되면서 한주의 북쪽 끝인 철원과 함께 발해에 대한 전진 기지의 역할을 수행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신라 하대에 들어 왕실 내의 빈번한 왕위 쟁탈전과 자연 재해로 정치 체제가 와해되고 농촌 사회의 해체가 가속화되면서 농민 봉기와 함께 지방에 호족이 등장하였다. 이때 견성군은 궁예(弓裔)의 세력권에 들어갔다. 양길(梁吉)의 부하이던 궁예는 그를 몰아내고 901년 왕위에 올라 송악에 후고구려를 세웠다. 905년 다시 철원으로 도읍을 옮기고, 911년 국호를 태봉(泰封)으로 고쳤다. 궁예는 신라와 당나라의 정치 체제를 모방하여 독자적인 통치 기구를 정비하는 등 개혁을 추진하기도 하였으나, 말년에 미륵불을 자칭하며 신정(神政)에 집착하다가 결국 왕건(王建)에게 쫓겨 죽임을 당하였다.
포천 지역에는 당시 궁예가 왕건의 군대와 접전을 벌였다는 전승이 많이 전하고 있는데, 궁예의 패전과 죽음을 안타까워하는 내용이 대부분이다. 이러한 전승 내용으로 볼 때, 견성군은 친(親)궁예적인 지역이었음을 엿볼 수 있게 한다.
[고려 시대]
918년 고려가 건국되고, 923년(태조 6) 명지성(命旨城) 장군 성달(城達)이 아우 이달(伊達), 단림(端林) 등과 함께 고려에 귀부하였다. 명지는 마홀의 다른 이름이라고 하는데, 백제가 다스릴 때의 이름인지 혹은 고구려식 지명인지 확실하지 않다. 견성군이란 지명 대신에 명지성을 칭한 것을 보면, 성달은 반(反)신라적인 인물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한 해 전인 922년 친궁예적인 명주 호족 김순식이 왕건에게 귀순한 것을 보면, 성달 역시 친궁예적인 호족으로 추정된다. 이후 왕충(王忠)이 명지성의 원보(元甫)가 되었으며, 928년 후백제군이 양산(陽山)[현 충청북도 영동군]에 성을 쌓자,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물리쳤다.
포천 지역은 고려가 멸망할 때까지 포주와 동음현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940년(태조 23) 태조 왕건이 후삼국을 통일한 후 견성군을 포주(抱州)로 고쳤다고 하는데, 이때 내을매현은 폐지하였는지 분명하지 않다. 성종 초 전국을 5도[서해도·교주도·경상도·전라도·양광도] 양계[북계·동계]와 경기로 나눌 때, 포주는 북계에 속해 있었고, 995년(성종 14) 다시 10도제로 개편하면서 포주에 단련사가 파견되었다. 1018년(현종 9) 전국을 5도와 양계로 나눌 때 양광도(楊廣道) 양주군(楊州郡)에 속하였고, 1069년(문종 23) 경기를 종전의 13개 군현에서 50여 군현으로 확장할 때 양광도에서 경기로 편입되었다.
1172년(명종 2) 양주군에서 분리하여 감무(監務)를 두고 포주를 다스리게 하였다. 공양왕 때 포주는 경기좌도에 속하여 과전법(科田法) 시행의 대상이 되었다. 고려 말 이색(李穡)이 세속을 떠나 왕방산(王方山)에 들어와 삼신암이란 암자를 짓고 은신한 이야기가 전하며, 실제 성여완(成汝完)은 고려의 국운이 기울자 왕방산 아래 계류촌[현 포천시 신북면]에 은거하면서 스스로 왕방 거사(王方居士)라 하였다.
한편 동음현[영평]은 1018년 동주(東州)[철원]의 속현이 되었고, 1106년(예종 1) 처음으로 지방관인 감무를 두었다. 1269년(원종 10) 위사공신(衛社功臣) 강윤소(康允紹) 장군의 고향이므로 동음 현감을 영흥 현령(永興縣令)으로 고치기도 하였다.
1173년(명종 3) 포주에 향교가 설치되어 지역민들을 교육하였고, 궁예의 영향을 받아 고려 초에 미륵불이 제작되기도 하였다. 내원사[백운산]가 도선(道詵)에 의해 창건되었다는 설이 있으며, 절터 유적을 통해 볼 때 고려 시대에 창건된 사찰이 많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 시대]
1393년(태조 2) 영흥현이 영평현으로 개칭되었으며, 1413년(태종 13) 포주가 포천현으로 개칭되면서 각각 현감이 파견되었다. 이때 포천의 이름이 처음으로 사용되었다. 광해군 때 포천현과 영평현이 합쳐져 영흥도호부로 승격되었고 경기 감영을 설치하기도 하였으나 1623년 다시 포천현과 영평현으로 분리되었다.
조선 초 포천현은 왕실과 밀착된 지역이었다. 태조·태종·세종 등 왕실의 사냥터와 군사 훈련장으로 이용되었고, 포천현 재벽동(滓甓洞)에는 신의 왕후[조선 태조의 비]의 농장이 있었고, 철현(鐵峴)에는 신덕 왕후[조선 태조의 제2비]의 농장이 있었다. 한편 영평현에도 개국 공신인 여진인 퉁두란[청해 이씨(靑海李氏) 시조 이지란(李之蘭)]을 모신 청해사(淸海祠)가 있음을 볼 때, 고려 시대의 포주·동음현보다 왕실의 관심을 많이 받았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배경에서 호국과 충절의 인물이 많이 배출되었다. 양치(楊治)는 세종조에 김종서(金宗瑞) 등과 함께 북방 개척에 무용을 떨쳐 함길도 절도사를 지냈고, 김종서가 세상을 뜨자 포천의 천주산(天柱山) 아래 지금의 포천시 신북면 기지리에 은거하여 두문불출하였다. 사육신의 한 사람인 유응부(兪應孚)는 포천의 소흘산(所屹山)에 거주하였고, 1455년(세조 1) 성삼문·박팽년 등과 함께 단종 복위를 꾀하다가 잡혀 죽었다.
임진왜란 과 병자호란 때 포천 지역에서 큰 전투가 벌어지지는 않았다. 다만 임진왜란 때 서울 이북 함경도로 통하는 교통로에 위치하고 있어 왜군의 주력 부대가 통과하게 됨으로써 많은 피해를 입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때 큰 공을 세운 인물을 다수 배출하였는데 임진왜란 때는 이항복(李恒福), 이덕형(李德馨), 권종(權悰), 이성길(李成吉), 황정욱(黃廷彧) 등이 활약하였다. 병자호란 때 공을 세운 포천의 인물로는 조득남(趙得男), 이시백(李時白), 서성(徐渻), 이성남(李星男), 정지상, 이영 등이 있다.
포천 지역은 한양과 근접하였고, 수려한 경관을 가지고 있어 왕자와 사족(士族)들의 은거지로 이용되었고, 이들의 무덤 또한 많이 남아 있다. 태종의 외손인 이즙(李楫), 선조의 12남인 인흥군(仁興君), 인조의 3남이자 효종의 동생인 인평 대군(麟坪大君), 철종의 아버지 전계 대원군(全溪大院君) 등의 무덤이 있고, 이 밖에 박순·이덕형·이항복·조경 등 사족의 무덤이 있다. 금강산 유람 길에 오른 관리와 선비들은 포천현 안기역에 머물렀고, 영평현은 수려한 영평 팔경이 있어 많은 문인과 묵객들이 찾았던 곳이다.
조선 후기 포천 지역에서 주목되는 사건 중에 노비와 일반 백성이 관련된 현종 강상 사건과 여환의 혁명 모의 사건을 들 수 있다. 1674년(현종 15) 포천 지역에 살던 노비 전석(全石)이 상전을 살해하려고 한 사건에 연루되어 포천읍이 일시적으로 혁파되었고, 당시 현감이 파직되기도 하였다.
1688년(숙종 14) 요승 여환(呂還) 등 11명이 혁명을 꾀하다 처형되었다. 양주, 영평의 인물들과 함께 미륵 신앙을 믿고 세상을 개혁하려고 하였다. 영평 사람으로는 지사(地師) 황회(黃繪)와 상한(常漢) 정원태(鄭元泰), 정호명(鄭好明)·이말립(李末立)·정만일(鄭萬一) 등이 참여하였다. 처형된 가담자 11명 중 영평 출신은 5명이었다. 가담자를 잡아들이는 과정에서 양주와 영평 사람들이 괴로움을 피해 농사를 폐하고 도망해 흩어져 숙종이 특별히 경기도 감사에게 유지를 내려 민심을 위로하고 다시 고향으로 돌아오도록 회유하게 하였다.
조선 후기에 포천 지역은 근기(近畿) 지역을 대표하는 상업 도시로 명성을 얻었다. 인구도 증가하여 포천현의 경우, 1454~1842년경의 변화를 보면 400여 년 만에 2,300여 가구가 늘었고, 인구는 1만 2000여 명이 증가하였다. 또한 금강산을 지나 함경도와 북방으로 가는 관북대로[경흥대로]상에 위치하여 물산의 유통이 빈번하여 상업이 발달하였다. 특히 포천시 소흘읍 송우리에 있는 송우점과 송우장은 조선 후기 경기 북부의 대표적인 점막 시장[점포 상점]으로 동북 방면과 도성을 연결해 주는 상업 요충지이었다. 이는 한국의 근대화를 이끈 주요한 원동력이 되었다.
[개항기]
1895년(고종 32) 지방 관제 개정에 따라 포천현과 영평현을 병합하여 포천군으로 승격하였으나, 다음해 영평현을 다시 분리하였다. 1896년 10월 포천 내동 소학리(巢鶴里) 역답(驛畓)에서 소작인과 마름[舍音] 사이에 분쟁이 일어났다. 이때 마름이 도지(賭地)[평균 수확량의 약 33%]로 소작료를 납부하도록 한 규정을 무시하고 병작반수(竝作半收)[수확량의 50%]를 실시하자, 소작인들이 반발하여 자신들의 뜻을 관철하였다.
포천 지역은 개항기 위정척사 사상의 태두인 이항로(李恒老)가 살았던 양평군(楊平郡)과 인접해 김평묵(金平默)과 최익현(崔益鉉) 등 대유학자들을 배출함으로써 이들의 사상적 영향이 일반 대중에게까지 널리 확산되었다. 이러한 위정척사 사상을 바탕으로 한 유림적 전통은 개항기 포천 지역에서 의병 투쟁이 적극적으로 일어나는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하였고, 이은찬(李殷瓚)·연기우(延基羽)·강기동(姜基東)·윤인순(尹仁淳) 의병 부대의 항쟁지로서 많은 사람들이 의병에 가담하는 한편 또 적극적으로 지원하였다.
[일제 강점기]
1910년 국권 피탈 후 1914년 영평군을 다시 포천군에 통합하였다. 포천은 개항기부터 의병 항쟁의 중심지로서 항일 의식이 높은 지역이었고, 1910년대 서당 교육을 통한 민족 교육이 활발한 지역이었다. 1917년 조선 총독부의 조사에 따르면 포천 지역의 서당 수는 82개에 달하였다. 실력 양성론 등 애국 계몽 운동의 연장선에서 야학 및 독서회 등이 결성되었다. 근대식 교육 기관으로 영평 공립 보통 학교[1910년 9월 1일]와 포천 공립 보통 학교[1911년 9월 1일]가 세워졌다.
3·1 운동 역시 투철한 항일 의식을 바탕으로 격렬하고 적극적으로 전개되었으며, 나아가 폭력 시위로까지 발전하였다. 만세 시위운동을 계획하고 조직하는 데 서당 훈장 등 유생들이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고, 여기에 농민들이 적극적으로 호응함으로써 시위가 크게 발전하였다. 3·1 운동을 주도한 인물로는 고진환(高鎭煥), 안응건(安應乾), 유중식(兪中植), 이영여(李榮汝), 이이만(李二萬), 정수환(鄭壽煥), 조계식(趙啓植), 조훈식(趙薰植), 최석휴(崔錫休), 최학돌(崔學乭), 함병현(咸炳鉉) 등이 있다.
1920년대 포천 청년회, 포천 산업 청년회, 송우 청년단(松隅靑年團) 등 청년 단체가 조직되어 포천 노동 야학·양문 노동 야학·유정 노동 야학(楡亭勞動夜學)·갈월리 동기 야학(冬期夜學)·갈기 노동 야학·용정 노동 야학(龍井勞動夜學) 등의 노동 야학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1930년대 농민 대중들에 의해 일제 식민지 농업 정책과 식민지 지주제에 저항하는 농민 운동이 전개되었다. 조선 총독부 조사에 따르면 1934년에 6건, 1935년에는 50건, 1936년에는 35건의 소작 쟁의가 발생하였고 일제 식민지 농정에 반대하는 수리 조합 반대 운동도 거세게 일어났다.
1940년대 태평양 전쟁의 발발로 국민 총동원령이 실시되면서 인적·물적 수탈이 극심해졌다. 일제 강제 동원 피해 신청에 2005년 3월 8일 현재 180건이 접수되었고, 유형별로 보면 노무자가 138명으로 가장 많았고 군인 29명, 군속 13명 등으로 나타났다.
[현대]
광복 후 남북이 분단되면서 미군과 소련군의 진주로 포천 지역이 남북으로 갈리는 아픔을 겪었다. 창수면·관인면·영중면·영북면·일동면 등이 공산 치하에 들어갔고, 5년 동안 북한은 양민 수탈과 애국 인사들의 체포·고문·학살 등의 소름 끼치는 만행을 수없이 자행하였다.
미군정에서는 남북 교류장으로 포천이 주목되었고,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과 이듬해 미군 철수 후 북한 도발이 빈번해 1949년 6월 12일 약 200명의 병력이 현 포천시 일동면 사직리를 공격하기도 하였다. 포천 지역은 서울의 관문과도 같은 중요한 지역으로서 피아간에 주력이 대결하였던 지역이었다. 6·25 전쟁 당시 북한의 포천 지역 공격 병력은 제3사단 1만 2000명, 제4사단 1만 2000명, 제105기갑여단 4,000명으로 합계 2만 8000명에 달하여 북한의 전체 화력의 1/3이 이곳에 집중되었다.
반면 국군은 의정부에 지휘소를 둔 제7사단의 제1, 제9 양 연대가 사직리~초성리~적성 간 47㎞에 달하는 지역을 경비하고 있었다. 실제 포천 지역에 배치된 국군은 제9연대 제2대대만이 본부를 포천시 군내면 구읍리에 두고 경계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다. 전쟁 개시 7시간 만에 포천은 점령되었다. 북한군 점령하의 포천 주민들은 자발적으로 소리봉(蘇利峰) 부대, 독수리 유격대를 조직하여 적의 정보를 차단하거나 교통을 혼란시키면서 적 후방을 교란시켜 적으로 하여금 정상적인 전투를 수행할 수 없도록 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포천군청은 부산으로 피난하였다가 9·28 수복으로 10월 14일 복귀하였다. 1951년 1월 4일 중공군의 침공으로 다시 철수하였다가 6월 24일 복귀하였다. 그러나 청사가 전소되어 포천면 어룡리에 임시 청사를 두었다가, 11월 14일 현 군청 소재지인 포천읍 신읍리로 이전하였다. 당시 포천군의 행정 구역은 10개 면 67개리로 구획되었다. 이후 38선 이북 지역의 5개 면을 탈환 수복하여 행정권을 이양할 때까지 군정 하에 북포천이라 하여 북포천 군수를 두었다가, 1954년 11월 17일 수복 지구 행정권 이양으로 12개 면 88개 리로 구획되었다.
6·25 전쟁 이후 개성 지방의 기후와 토질이 거의 같은 포천과 연천 지방에는 남하한 개성 인삼 농사인들에 의해 인삼이 재배되기 시작하면서 현재 개성 인삼의 최대 생산지가 되었다. 포천 지역에서는 2005년부터 개성 인삼 축제를 개최하고 있다.
1963년 포천군 내촌면에 화현출장소가 설치되었고, 1973년에는 포천면 탑동리가 양주군 동두천읍에 편입되었으며, 1979년에는 포천면이 읍으로 승격되었다. 1983년 연천군 관인면 일원이 군에 편입되었고, 청산면의 삼정·갈월·금동·덕둔 등 4개 리가 신북면에, 초성·대전·장탄·궁평·백의 등 5개 리가 연천군으로 편입되면서 청산면이 연천군 관할로 되었다.
또 같은 해에 화현출장소가 화현면으로 승격되었으며, 1989년 포천시 관인면 부곡리가 연천군 연천읍에 편입되었고, 1996년에는 소흘읍으로 승격되었다. 2003년 대통령령 6928호에 따라 도농 복합 시로 승격되었고, 포천읍은 포천동과 선단동으로 분리되면서 행정 구역은 14개 읍, 면, 동[1읍, 11면, 2동]으로 구성되었다.
[포천의 역사 문화적 특징]
포천 지역은 한반도 중부 내륙에 위치하고, 남북 이동의 경유지로서 주변 지역의 문화 유입과 전파가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 새로운 문화와 사상에 대해 유연하게 대처하는 특징을 보이는 반면, 포천만의 독특한 생활 모습은 쉽게 찾아지지 않는다. 다만 지역 내에서 산지가 많은 영중·관인 등 북부 지방이 상대적으로 산지가 적은 포천·소흘 등 남부 지방에 비해 땅에 대한 귀소성과 전통에 대한 계승 의식이 완고한 편이다. 또한 북부 지방은 광복 후 남북 분단을 직접적으로 경험하였던 역사성과도 무관하지 않다.
한편 지정학적인 이점에도 불구하고 사회·경제적 기반이 열악하여 세련되고 우아한 문화와 예술을 꽃피우지 못하였지만, 자연에 순응하는 소박한 문화를 간직하고 있으며, 다른 지역에 비해 양반과 서민 문화의 구별이 뚜렷하지 않다.
봉건 정부와 일제에 저항하였던 포천 지역민들의 저항 의식은 궁예의 미륵 신앙과 조선 시대 선비들로부터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미륵 신앙은 새로운 세계를 염원하는 혁명으로 발전하였고, 청렴과 절의를 벼슬보다 우선하였던 선비들의 영향으로 저항 의식이 확대되어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