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덕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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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내리에서 자녀교육과 관련하여 모범적인 가정으로 추천해 준 분은 풍덕마을 방풍림계에서 ‘장한 어머니상’을 수상한 이임기 여사였다. 그를 처음 만난 곳은 그의 텃밭에서였다. 취재에 대해 설명하고 인사도 할 겸해서 그의 집으로 방문하자 그는 집 앞의 텃밭에서 김매기를 하고 있었다. 잠시도 쉬지 않는 그의 성실하고 근면한 삶의 모습이다. ‘자녀들 기른 이야기’를 부탁한다고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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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선사시대부터 가축을 길러왔다. 최초의 가축은 개일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가축으로 분류되는 동물들은 포유류나 조류 등이다. 우리의 농촌에서 전통적으로 길러온 가축으로는 개, 말, 소, 돼지, 양, 염소 등과 닭, 오리, 거위 등이었다. 가축은 여러 가지 용도로 생활에 이용되어 왔다. 고기, 알 등의 먹을거리를 얻거나 털을 이용하여 실을 만들기도 하고 가죽을 이용하여 옷을 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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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동 은 비석동산의 동쪽에 형성된 마을로 큰말과 신골(싱골)로 이루어졌다. 성동마을로 가는 길은 풍덕마을과 같다. 즉 주덕에서 노은으로 연결되는 525번 지방도를 따라가다 1.9㎞ 지점이 주막거리이고 이곳에 성동마을 버스정류장이 있다. 이곳 버스정류장 옆에는 성동마을 안내비와 이덕량의 개척비가 세워져 있다. 이곳에서 북쪽으로 마을에 이르는 길이 나있고, 왼쪽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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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광복 직후인 12월 풍덕마을의 이부영 등 젊은 청년들 16명은 계몽회를 조직하였다. 이들은 주민들의 계몽활동에 뜻을 두고 일제하에서 배우지 못한 사람들에게 한글을 깨우치게 하기 위한 문맹 퇴치 운동을 펼치면서 야학을 시작하였다. 야학은 계몽회 회원인 이상갑의 사랑방을 빌려서 시작하였는데 글 모르는 이들을 모아 가르쳤다. 굳세게 밝게 바르게 생활하자는 뜻으로‘강(强)·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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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충주시 지역에 소재한 오래된 옛집의 총칭. 고가는 계층성에 따라 상류 주택, 중류 주택, 서민 주택으로 분류할 수 있다. 상류 주택은 경제력 있고 지배층인 양반의 집으로 반가(班家)라 하며 지역에 따라 분포가 달리 나타난다. 반가는 안채와 사랑채를 비롯하여 기타 공간으로 이루어지며 기능과 성격에 따라 다양한 마당이 형성된다. 채와 칸의 분화가 발달한 형태로 나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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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내리의 풍덕마을에는 과거 72동의 주거 가옥이 있었다. 이중 목조가옥이 9동, 토담집이 3동, 흙벽돌집이 40동으로 전통성을 지닌 가옥이 52동이나 되었다. 나머지 20동은 17동의 시멘트벽돌 가옥과 3동의 조립식인 현대식 주거 건물이었다. 그 중 전통성 있다고 생각되는 50여 동의 건축물 중 건축학적 및 보존적 차원에서 가치가 있다고 판단되는 이민재의 목조가옥과 이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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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 소개되는 고문서류는 풍덕마을의 방호3파인 이충배(李忠培) 씨의 댁에 있는 자료들이다. 이복영·이충배 씨는 숙종 때 벼슬을 한 이진항의 후손으로 이진항(李震恒)이 받은 7점의 교지와 1점의 점령을 소장하고 있다. 고문서류 외에 호패·화살통·화살집·가죽으로 만든 인궤(印櫃) 등이 있다. 교지는 왕이 신하에게 벼슬·시호·자격·토지·노비 등을 내려주는 사령의 문서를 말한다. 문무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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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내리에 전해오는 대표적인 금석문으로는 풍덕마을의 동쪽 언덕인 제내리 353번지에 입향조 이덕량의 장남인 이정지(李廷芝)의 묘와 묘역 입구에 묘비가 있다. 묘역은 넓고 여러 기의 묘가 있다. 이정지의 묘는 가장 상부에 있으며 10여 평의 규모에 상석과 망주석이 있다. 묘비는 묘역으로 진입하는 입구인 마을쪽 언덕 위에 있으며 비각을 세우고 있어 이채롭다. 비석의 총 높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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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덕마을에 사람들이 언제부터 살았는지는 알 수가 없다. 다만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난의 직접적인 피해를 입었던 이곳은 폐허가 되었다한다. 그러던 중 1595년 조선 태조 이성계의 장남 진인대군의 후손인 이덕량(李德樑)이 난을 피해 여러 곳을 돌아다니다가 이곳에 정착하게 되었다. 이덕량[1576~1651]의 자는 하경(厦卿)이고 처음 이름은 덕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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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덕마을에서는 일찍부터 주민들의 불편을 덜기 위하여 필요한 농기구를 방풍림계에서 구입하여 활용하고 있다. 1953년 11월에는 양곡의 공판 시에 저울이 필요함으로 5개를 구입하여 각 반에 나누어 주었으며, 1958년에는 분무기(배부식)를 5개 구입하여 각 반에 나누어 주었다. 1961년 4월에는 미국 극동개발재단에서 동력 분무기를 기증받기도 하고, 1962년에는 양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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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2년 당시 농림부장관이 주도하여 사단법인 ‘농촌실행협동조합’을 조직하였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이상덕이 이팔영, 이세영 등 10여 명의 회원을 모아 쌀 두말씩을 투자하여 충주책임자에게 전달하였다. 그러나 농업협동조합법의 제정을 둘러싸고 서로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었던 금융조합연합회와 농민회, 농림부, 국회가 논의를 거듭하였으나 합의에 실패하였다. 그 이유는 협동조합이 금융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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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촌진흥회는 1932년(壬申) 1월 29일 이성호(李誠浩) 외 44명이 벼 한 말(50전)씩 거출하여 종자돈으로 삼아 자력갱생과 저축 증대를 추진하며, 마을에서 혼인이나 상례 시에 반드시 사용하는 차일·교자·상여·남녀의 혼례복 등을 마련하고, 일이 있을 때 불편함이 없도록 상호 협조하며 상호부조(相互扶助)하던 조직이었다. 1954년까지 가입한 회원의 총수는 82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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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내리는 조선시대 충주목이 관할하는 38개면 중 덕면(德面)에 소속되어 있었다. 덕면이 관할하는 마을을 처음으로 기록한 지리지는 1759년 발행된 『여지도서(輿地圖書)』로 상동리, 중동리, 천서리, 천동리, 금곡리 등 5개리가 기재되어 있고, 그 이후에 발행한 지리지에는 아래 표와 같이 마을 이름이 늘거나 약간씩 차이를 보이고 있다. 이 표를 보면 『여지도서(輿地圖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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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촌마을은 지리적·사회적·경제적 조건에 따라 자연발생적으로 형성된 기장 기초적인 농민의 생활공동체이다. 제내리에서도 농경을 중심으로 지리적·지형적 특성에 따라 경작지에 인접한 풍덕마을에 정착함으로써 농촌마을을 이루었으며, 마을은 농경에 기초한 노동교환, 상호부조, 문화교류 등과 같은 사회적·문화적·경제적 상호작용의 장이기도 하였다. 이러한 마을은 부락민들 사이의 일체감과 동질감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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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마을단위로 형성되어 있는 최하위의 행정구역은 리(里)이다. 이를 행정리라 하는데 제내리는 성동과 풍덕 등 두 개의 자연마을을 결합하여 하나의 리가 되었다. 리(里)의 연원은 조선시대부터 시작된다. 즉 군(郡), 현(縣)을 두고 현(縣) 밑에는 면(面, 또는 방(坊),사(社)) 그리고 리(또는 촌(村), 동(洞))로 편성하였다. 리장, 동장은 리정, 동수, 존위, 약수, 통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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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내리 풍덕마을이 선구적인 농촌마을로 발전할 수 있었던 데에는 대를 이어 마을을 이끌어 온 선구자적인 지도자들의 끊임없는 노력이 계속되었기 때문이다. 풍덕마을에는 마을의 행정업무를 담당하는 이장을 비롯하여 각종의 모임들이 조직되어 마을의 안녕과 질서를 유지하며 발전을 위해 공동의 노력을 기울여 왔다. 이러한 각종의 모임들은 운영해 가는 과정에서 시대상황의 변화에 따라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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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내리의 방풍림은 마을 주민들이 자연스럽게 모여드는 공동의 장소가 되었다. 마을 숲이 된 방풍림은 무더운 여름철 마을 사람들에게 피서와 휴식처를 제공하였으며, 또한 각종 영농에 관한 정보교환의 장소이자 마을 주민들이 화합을 도모하며 공동 행사를 치룰 수 있는 집회소로서의 공간을 마련해 주었다. 더구나 그동안 회의와 토론의 장으로 쓰이던 공회당이 새마을 운동의 시작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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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충주시 주덕읍 사락리에 있는 조선 전기 사당. 사당은 선현과 조상의 업적과 넋을 기리고 그들을 추모하기 위하여 만들어진 것으로 매년 정기적으로 제향이 올려진다. 명덕사는 1395년(태조 4) 태종과 효빈 김씨 사이에서 태어나 1458년(세조 4)에 죽은 경녕군을 추모하기 위하여 조선 전기에 건립되었다. 충주시에서 장호원 방면으로 국도 3호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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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내리에는 몇 개의 제조업체가 입주해 있다. 가금류 육가공을 하는 ‘미림’, 석재 가공업을 운영하는 ‘지이엠 바이오 산업(주)’, 축산기계를 생산하는 ‘(주)풍덕 축산 기계’가 영업 중이다. 그리고 두 개의 미곡처리장이 입주해 있다. 하나는 농협 투자 시설인 주덕·서청주·노은 연합 미곡처리장으로 제내리 서쪽 끝자락 부근의 장록리 마을 입구에 있다. 이곳에서는 ‘남한강 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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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충주시 주덕읍 제내리 풍덕마을 입구에 있는 비. 풍덕마을 입구에는 본래부터 숲이 있었으나 모두 고사하자 1906년 이석호(李錫浩) 등의 마을 사람들이 호당 겉보리 한 말씩을 추렴하여 숲을 조성하고 방풍림이라 명하였다. 1907년에는 수재, 화재, 풍재 등을 방지하고 위생을 철저히 하여 생명을 지키기 위해 정식으로 방풍림계를 결성하였고, 10개 조의 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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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내리는 우등산 자락이 서남진하며 펼쳐놓은 낮은 구릉지대를 중심으로 밭을 일구어 밭농사를 발달시켰다. 앞의 〈표4〉에서 살펴보았듯이 제내리에서는 논농사가 주를 이루었기 때문에 그동안 밭농사는 부수적 농업형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밭농사의 주된 작물은 고추, 참깨 등의 잡곡과 담배·인삼 등의 특용작물을 비롯하여 사과·배·복숭아 등의 과일을 재배하였다. 과일은 사과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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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내리의 주된 산업은 농업이다. 그것은 마을 앞에 넓게 발달된 평야에 방죽뱀이를 시작으로 공신앞들, 진개들, 사갑들이 펼쳐있어 넓은 들판을 이루었고, 우등산의 산자락이 치마폭을 드리운 듯 많은 밭을 일구어 주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들 가운데로 흐르는 요도천은 비옥한 옥토에 농업용수를 공급하며 넓은 대지를 풍요로운 논으로 탈바꿈 시켰다. 그러므로 제내리의 주민들은 그동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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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내리에서는 1952년 이순목 여사가 주동이 되어 가정생활을 개선하고 근검절약하는 생활로 합리적인 경제생활을 하자는 취지로 부녀회를 조직하고 부녀 계몽운동을 벌였다. 이 조직과 병행하여 1961년에는 이봉영 여사가 국민재건운동의 일환으로 관 주도적인 재건부녀회를 조직하여 운영하였으나 1965년에 해체하고 앞선 부녀회로 흡수되었다. 그 후 1972년에는 개발위원회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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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 10월 ‘새마을 가꾸기 사업’으로 시작된 이른바 새마을 운동은 1970년대 농촌 근대화를 목표로 한 범국민적 운동이었다. 1970년 가을 전국의 모든 농촌마을에 일괄적으로 시멘트를 지원하면서 마을 주민들의 총의에 따라 공동사업에 쓰도록 했던 것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이처럼 정부의 지원을 받아 시작된 새마을 운동은 근면·자조·협동을 기본정신으로 하여 물리적 환경 개선은 물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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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구란 풍수지리에서 좌청룡, 우백호 사이의 벌어진 공간을 말하는 것으로 이 공간을 통해 출입하는 물의 통로를 가리킨다. 수구가 너무 넓거나, 엉성하고 열려 있으면 마을이나 집터의 기운이 빠져나가는 것으로 여긴다. 그러므로 아무리 좋은 재물이 있다 하더라도 다음 세대까지 내려가지 못하고 저절로 흩어지고 없어져 버린다는 것이다. 『택리지』의 저자 이중환도 집터를 잡으려면 반드시 수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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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풍림이 숲을 이루며 마을의 풍요와 편안함이 함께함에 따라 풍덕마을 주민들은 숲의 보호와 육성을 위한 관리에도 열성적인 노력과 관심을 기울여 왔다. 다음의 사례들을 통하여 그러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1906년 7월 수구막이 숲이 고사하자 다시 조림하고자 이석호 등이 겉보리 한 말씩을 걷어 기금을 조성하였다. 이 기금에 공말과 속담말의 협조를 받아 제내리 306번지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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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농촌에서는 소작료가 지나치게 높고 이자가 장리(연리 5할)의 고율이었기 때문에 땅을 가지지 않거나 돈이 없는 소작농과 가난한 농민은 빈곤의 악순환을 벗어나기 힘들었다. 농지 개혁으로 소작료의 문제는 어느 정도 해결되었으나, 농촌사회에 뿌리 깊게 남아 있던 고리채로 인한 어려움은 더욱 가중되어 갔다. 이에 풍덕마을에서는 1961년 1월 풍덕신용조합을 창립하여 마을 주민들 스스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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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은은 농촌을 지켜온 토박이 농업인이다. 그는 학교를 졸업하고 농사일을 거들며 4H운동에 투신하여 침체된 풍덕마을의 4H운동에 활력을 불어넣으며 옛날의 명성을 되찾는데 앞장섰다. 군 제대 후 새마을 지도자가 된 그는 마을 발전을 위하여 혼신을 다하였고 이어 영농후계자로 선정되어 농업발전에 최선을 다하였다. 그는 1997년부터 2007년까지 11년간 풍덕마을의 이장을 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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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주에서 서쪽으로 3번 국도를 따라가다가 주덕읍 서북쪽으로 새로 확장된 서울 방면 3번 국도를 지나 500m쯤 더 가면 오거리가 나타난다. 이곳에서 동북쪽으로 우회전하여 접어들면 525번 도로가 북쪽으로 신중리의 넓은 들을 가로지르고, 신설된 3번 국도 지하도를 지나면 주덕평야의 넓은 들을 만난다. 주덕평야는 청원군의 미호평야와 오창평야에 이어 충북에서 세 번째로 큰 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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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앞 남쪽으로 넓게 트인 주덕평야가 펼쳐있어 넉넉함을 더해준다. 버드내들, 구레자리들이 자리 잡은 넓은 들판이 있기에 사람살기 넉넉한 터전이 되었다. 마을 앞 방죽뱀이를 시작으로 공신앞들, 사갑들, 진개들이 펼쳐지고 그 앞으로 한줄기 젖줄기가 서쪽에서 동쪽으로 흘러내려 대지의 목마름을 풍족하게 적셔준다. 이름하여 요도천(堯渡川)이다. 요임금이 건넌 강이라서 이름 붙였으니, 흐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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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덕마을 시내버스 정류장에서 북쪽으로 곧장 오르면 풍덕마을이 나타나는데 북위 37.5도, 동경 127.5도에 위치한다. 동쪽으로 멀리 국사봉[166m]이 보이고 화개산[190m] 앞쪽에 가장골산이 자리 잡고 앉았으며, 서쪽으로 장중하고 높은 가섭산[710m]이 멀리서 가려주어 황새동산이 자리하였다. 남쪽 멀리에는 어래산[399m]이 마주앉아 마을의 안산을 자처하였다. 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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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내리에서는 농촌 마을에도 유아원이 필요함을 일찍부터 깨닫고 1945년부터 유아원 설립을 군과 협의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1957년 제내리 농협의 발족을 계기로 이동식 전 주덕면의회 부의장이 유아원 설립을 다시 추진하였으나 역시 이루지 못하였다. 1960년도에 지역사회 개발 시범부락으로 선정되면서 농번기에 탁아소를 운영하게 되었으며, 이를 계기로 유아원 설립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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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내리의 대표적 유적으로는 풍덕마을의 서남쪽에 있는 토계원지이다. 토계원은 대소원과 용원으로 통하는 중간지점에 설치되어 모도원으로 이어지는 영남대로 상에 위치하였다. 지금은 논으로 변한 사갑들 앞의 들 가운데 어디쯤으로 추정되고 있지만, 옛날에는 원이 있는 작은 마을을 형성하고 있었다고 한다. 현재로서는 이 마을이 언제 없어졌는지 알 수가 없다. 수년 전 농경지 정리사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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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충주시 주덕읍 제내리에 있는 풍덕마을 방풍림계를 창설한 이석호의 공덕을 기리는 비. 주덕읍 제내리 풍덕마을 입구의 허함을 막기 위하여 1906년 호당(戶當) 보리 1말씩을 추렴하여 계를 만들어 방풍림을 창설한 참봉 이석호의 공덕을 기리기 위하여 풍덕마을 주민들이 1955년 3월 창설 50주년 비를 건립하였다. 주덕 오거리에서 노은 방향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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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연구가 이세영 씨를 처음 만난 곳은 숲거리였다. 풍덕마을 조사를 위한 기초 자료를 수집하고자 전화로 자료를 부탁드리고 충주를 출발했다. 풍덕마을에 도착하니 도로 사정을 비롯한 몇 가지 기초조사와 마을 입구 정류장 주변의 사진도 몇 장 찍은 후인지라 예정시간보다 훨씬 늦은 시간이 되었다. 처음 뵙게 되는 상황이라 마을에 도착해 댁으로 찾아뵐 요량이었다. 그런데 숲거리에 도착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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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형배는 육형제 중 다섯째로 태어나 오로지 고향만을 지켜온 토박이 농업인이다. 그는 여러 형제들과 함께 성장했기에 인성이 바르고 양보심과 인내심이 남다른 훌륭한 성격의 소유자로서 마을에 이름이 나 있었다. 형제간의 우애도 남달라서 돈독하고 행복한 가정을 이끌고 있다고 하였다. 그는 학교졸업 후 줄곧 고향에 남아 농업 발전에 최선을 다하였다. 농사뿐만 아니라 축산업도 겸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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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내리는 주덕읍 11개 법정리 중의 하나이며, 성동과 풍덕의 2개의 행정부락으로 이루어져 있다. 성동이 28통이고 풍덕이 29통이다. 2008년 3월 현재 98가구 258명이 살고 있으며 남자가 139명, 여자가 119명이다. 주덕읍 전체인구가 6,480여명이니 제내리 주민이 차지하는 비율이 5% 정도이다. 제내리의 주민 258명 중 성동에 109명(남자 56명, 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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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사회개발 사업은 1958년 10월 이 사업을 추진할 ‘지역사회개발중앙위원회’가 조직되어 각 도 및 군 단위의 지역사회개발위원회가 결성되며 시작되었다. 관 주도로 시작된 지역사회 개발사업은 군수를 위원장으로 하여 군의 관계과장, 교육감, 농사교도소장, 협동조합장 및 중앙위원회에서 파견된 4명의 지도원으로 ‘지역개발군위원회’가 설치되었다. 그 밑에 시범부락의 부락민으로 구성된 ‘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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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내리는 전주이씨 진안대군파의 집성촌으로 번성을 이루어 왔다. 이덕량의 부친인 이식(李軾)을 시조로 방호파를 이룬 것이다. 이처럼 전주이씨가 대종을 이루며 세거하고 있기 때문에 마을의 공동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대부분의 마을에 존재했던 대동계가 없는 것이 특징이다. 대동계의 역할을 종회가 중심이 되어 풀어나가고 있었기 때문이란다. 그러나 성동마을의 경우에는 타성의 유입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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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용은 이복영 전 주덕농협 조합장의 차남으로 태어나 군색함이 없이 성장하였다. 충주농업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군 복무를 필한 후 뜻한 바 있어 다른 젊은이들처럼 사회에 진출하지 않고 고향에 정착하였다. 그는 마음속에 농업에 종사하면서 고향마을을 전국 제일가는 농촌마을로 일구어 보겠다는 푸른 꿈을 굳게 간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꿈은 1988년 영농후계자로 선정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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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덕에서 노은으로 연결되는 525번 지방도를 따라가다 2.2㎞ 지점에 이르면 풍덕마을 버스정류장이 나타난다. 이곳 버스정류장 옆에는 풍덕마을 안내 입석과 ‘전주이씨진안대군파세거지(全州李氏鎭安大君派世居地)’라는 표지 입석이 마주 서서 오는 이를 반겨준다. 이곳에서 북쪽으로 난 길을 따라 오르면 황새동산과 서방모랭이를 끼고 동북쪽으로 이어지다 숲거리에 와서 두 갈래 길이 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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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약(鄕約)이란 향촌규약이나 그 규약에 근거한 조직체를 말하는 것으로 우리 선조들이 향촌에 살면서 향인들이 서로 도우며 살아가자고 약속한 것을 일컫는다. 향규, 향약계, 향안, 동약, 동계, 동안, 족계, 일향약속, 약속조목 등의 다양한 의미를 가지기도 했다. 향약은 서로 간에 유교적인 도덕을 선양하기 위하여 권선징악(勸善懲惡)을 바탕으로 지방자치 정신을 함양하고 향민의 화합을 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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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제내리에는 258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 풍덕에는 53가구 149명(남자 83명, 여자 66명)이, 성동에 45가구 109명(남자 46명, 여자 52명)이 거주하고 있다. 그간 제내리를 삶의 터전으로 가꾸어 살아온 이들의 호구 변동을 각 지리지를 통하여 살펴보면 다음 〈표2〉와 같다. 위의 표를 보면 1759년에는 3,583명의 주민 중 여자의 수가 남자의 수 보다 1천여 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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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6년까지만 해도 풍덕마을에는 라디오가 한 집도 없었다. 유성기가 2대, 신문 구독자가 겨우 세 집 뿐으로 새로운 소식을 접하는 것조차 어려운 형편이었다. 더구나 면사무소나 조합의 회의에 참석하고 온 대표가 소식을 전하려면 동산에 올라가서 회의하러 오라고 소리 높여 외치거나, 집집마다 찾아다니며 전해야만 했다. 이러한 전달 방법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이처럼 행정적 전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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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2년 풍덕과 성동이 힘을 모아 공동으로 공회당을 세우기로 합의하였다. 이에 풍덕마을의 이칠영(李七榮)이 제내리 303번지의 밭 200평을 부지로 희사함으로써 풍덕마을에 세우게 되었다. 풍덕에서는 방풍림계에서 건축비의 반액(62원 50전)을 지불하였다. 그 후 1934년에는 동네의 학생들이 멀리 용원과 대소원으로 통학하는 어려움을 겪게 되자 사립학교를 건립 운영하고자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