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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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충주시 신니면 마수리·선당리·화안리에 걸쳐 있는 산. 석가모니 부처의 십대 제자인 가섭존자(迦葉尊子)에서 유래한 것으로 추정된다. 해발고도 709.9m의 산으로, 주변이 평야나 낮은 고개로 둘러싸여 있어서 멀리서도 잘 보일 만큼 큰 산이다. 북쪽은 요도천 유역의 곡저평야, 남쪽은 음성천과 한벌천을 따라 발달한 좁은 곡저평야가 형성되어 있다. 또한, 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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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와 조선시대 충청북도 충주시에 있었던 특별행정구역. 부곡·향(鄕)·소(所)·처(處)·장(莊) 등의 지방 특별행정구역은 기원이 삼국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러나 충주목에 설치된 감물내미부곡의 기원은 고려시대로 추정된다. 고려시대 부곡은 대체로 신라 말 고려 초에 후삼국 통합전쟁 중에 저항한 호족세력 지역의 주민들을 강제적으로 편성하면서 집중적으로 형성되었다. 후삼국 통합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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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 전후부터 후삼국시대까지 충청북도 충주시의 역사와 문화. 중국의 『삼국지(三國志)』에는 3세기 한반도 상황이 기록되어 있다. 당시 한반도의 중부와 남부 지역은 마한·변한·진한으로 구분되었으며, 70여 개의 소국(小國)이 있었다. 백제와 신라도 각각 백제국(伯濟國)과 사로국(斯盧國)이란 이름의 소국으로 등장하여 주변 소국들과의 경쟁을 통해 성장하였다. 한국 고대사회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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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주사고는 1390년(공양왕 2)부터 임진왜란이 일어나는 1592년까지 약 200년 동안 고려의 중요 전적과 조선 전기의 역대 실록 그리고 중요한 서책과 문서를 보관하던 창고의 하나였다. 그러나 1592년 4월 28일 충주 탄금대 전투에서 신립이 패하여 충주시가지가 불탈 때 시가지 내에 있던 충주사고와 그에 보관된 서책들도 사라졌다. 우리나라는 일찍부터 역사를 기록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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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8년에서 1392년까지 고려왕조가 지속되었던 시기의 충청북도 충주시 역사. 충주란 고을 이름은 태조 왕건(王建)이 후삼국을 통일한 후 940년(태조 23) 전국의 군·현을 개편하고 주·부·군·현의 명칭을 고칠 때 중원부(中原府)를 고쳐 부르면서 나타났다. 충주란 명칭은 이 지역 인사들이 태봉시대부터 태조 왕건의 우익이 되어 고려를 건국하고 후삼국을 통일하는 과정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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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와 조선시대 충청북도 충주시에 있었던 특별행정구역. 부곡·향(鄕)·소(所)·처(處)·장(莊) 등의 지방 특별행정구역은 기원이 삼국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러나 충주목에 설치된 광반석부곡의 기원은 고려시대로 추청된다. 고려시대 부곡은 대체로 신라 말 고려 초에 후삼국 통합전쟁 중에 저항한 호족세력 지역의 주민들을 강제적으로 편성하면서 집중적으로 형성되었다. 후삼국 통합 후 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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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충주시 용산동에서 광부처거리와 관련하여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 「광부처거리 전설」에서의 ‘광부처거리’는 충주시 용산동 및 성남동과 동계를 이루는 거리를 지칭한다. 괴이한 주지승의 얼굴과 광기가 어린 눈을 잊지 못하고 부처를 조성하였기에 미친 철부처가 탄생되었으며, 이로 인하여 사람까지 미치자 철불이 있던 거리를 광부처거리라고 명명되었다는 지명유래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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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자성, 이당을 시조로 하고 이극감을 입향조로 하는 충청북도 충주시 세거 성씨. 광주이씨(廣州李氏)는 신라 내물왕 대에 내사령을 지낸 이자성(李自成)을 시조로 한다. 이자성은 원래 칠원(현 경상남도 함안)을 봉토로 갖고 있던 칠원백이었으나 통일신라가 망한 후에도 고려 태조 왕건에게 불복하였으므로 왕건이 이자성의 신분을 낮추어 회안의 호장으로 삼았다. 그 후 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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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시대 충청북도 충주 지역에 있던 고구려의 지명. 국원성은 만주 지역을 중심으로 세력을 확장하던 고구려가 한반도 남쪽으로 영역을 확장하면서 확보한 거점 지역인 오늘날 충주 지역에 성을 쌓고 붙인 이름이다. 이 지역은 신라가 차지한 후 진흥왕 대에는 국원소경(國原小京)으로, 경덕왕 대에는 중원경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고려가 건국되고 나서 태조에 의해 충주라는 명칭으로 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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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충주시의 시화(市花)인 쌍떡잎식물 국화목 국화과의 한해살이풀. 국화는 꽃의 크기에 따라 대국(大菊, 18㎝ 이상)·중국(中菊, 9㎝ 이상)·소국(小菊, 9㎝ 이하)으로 나누고, 꽃이 피는 시기에 따라 추국(秋菊, 10~11월)·동국(冬菊, 12월 이후)·하국(夏菊, 5~6월)으로 나눈다. 일반적으로 추국이 가장 흔하다. 국화는 전 세계에 20여 종이 분포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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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53년(고종 40) 9월 충청북도 충주시 금당협에서 고려군이 몽고군을 격파한 전투. 금당협 전투는 1253년 몽고군의 제5차 침입 때 금당협 지역에 침입한 몽고군을 충주의 창정(倉正) 최수(崔守)가 매복하였다가 격퇴한 전투로, 충주산성 전투의 서전이라 할 수 있다. 금당협의 위치는 기록에 따라 차이를 보인다. 촌상우차랑(村上友次郞)이 1015년에 쓴 『최근지충주(最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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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삼재를 시조로 하고 유한찬을 입향조로 하는 충청북도 충주시 세거 성씨. 기계유씨는 신라 때 제6관등 아찬 유삼재(兪三宰)를 시조로 한다. 유삼재의 후손 유의신(兪義臣)이 통일신라가 망한 후에도 고려에 불복하므로 태조 왕건이 유삼재의 신분을 낮추어 기계(현 경상북도 포항시 북구 기계면)의 호장(戶長)을 삼았다. 이후 후손들이 기계를 본관으로 삼았고, 후대로 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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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신라시대 때 충청북도 충주 지역에서 활동했던 서예가. 711년(성덕왕 10)에 태어난 김생(金生)은 안동의 문필산, 경주의 경일봉 석굴, 봉화 청량산 김생굴, 음성군 원통산 기슭의 김생암 등에서 글씨 공부를 하였다고 한다. 충주 북진의 언덕에 김생사(金生寺)가 있었는데 김생이 두타행(頭陀行: 승려의 수련)을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전한다. 이를 미루어볼 때 김생은 말년에 충주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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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2년 충청북도 충주 출신 시인 박재륜이 충주에서의 삶을 노래한 창작시. 남한강 시인이라 불렸던 박재륜의 충주에서의 삶이 잘 드러나는 시이다. 1972년 시집 『전사통신(田舍通信)』에 수록된 창작시이며, 1993년 충주에 건립된 시비에도 새겨진 작품이다. "그 옛적 고려(高麗)와 남조선(南朝鮮)/뱃길이 발달하였다는 이 물줄기에/오늘은 다만 글자와 화상(畵像 뭉겨진 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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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주는 남한강의 중류에 위치하여 삼국시대부터 수로 운송을 이용한 교통의 요지로 중시되어 온 지방이다. 고려시대에는 전국의 세곡을 저장하는 12조창을 설치하였는데 충주에 설치한 조창이 덕흥창이었다. 고려 후기와 조선 전기에는 덕흥창 이외에 경원창이 설치되어 경상도의 세곡을 받아 경창으로 수송하였다. 1465년(세조 11)에는 금천(현 충주시 중앙탑면 창동리)에 있던 덕흥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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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 충청북도 충주 지역에 철 및 관련 수공업품을 생산하였던 특수행정구역. 다인철소가 언제 어떠한 경위로 설치되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고려사(高麗史)』·『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등의 기록에 몽고군을 격퇴한 공으로 다인철소가 현으로 승격되었음을 전하고 있다. 다인철소는 규모와 생산량, 철 가공 기술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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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후기 유학산성에서 다인철소민과 몽고군 사이에 있었던 전투. 고려시대 철소(鐵所)는 생활 용구나 무기류의 제작에 필요한 철을 생산하거나 제작하는 특수민들의 집단 거주지이다. 다인철소는 지금의 충주시 대소원면 지역으로,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는 “충주 서쪽 30리”에 있었다 하고, 『여지도서(輿地圖書)』에는 당시 이 지역이 ‘충주목 이안면’으로 편성되어 있었다고 기록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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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충주시 단월동에 있는 고려시대 고묘군. 고분이란 고총고분의 준말로 ‘큰 봉분을 가진 오래된 무덤’이라는 뜻이다. 삼국시대 초기 왕들이 권위의 상징으로 무덤을 대형으로 조성한 것을 일컬어 고분이라 했는데, 광의적으로 통일신라 이전의 무덤을 총칭한다. 따라서 고려시대의 무덤은 고고학적 개념에서 고분이라고 분류하기 어려워 고려시대 이후의 무덤은 고분과 구분 ‘고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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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와 조선시대 충청북도 충주시에 있었던 특별행정구역. 부곡·향(鄕)·소(所)·처(處)·장(莊) 등의 지방 특별행정구역은 기원이 삼국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단월부곡 역시 고려시대에 이미 단월역으로 개편되고 있으므로, 기원은 그 이전시기로 소급된다. 최근의 연구에서는 삼국시대에 부곡의 선행형태를 찾기도 하였다. 고려시대 부곡은 대체로 신라 말 고려 초에 후삼국 통합전쟁 중에 저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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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 충청북도 충주 지역의 옛 이름. 『고려사(高麗史)』에는 충주의 다른 이름으로 대원(大原)과 예성(蘂城)이 등장한다. 그 중 대원은 고려 성종이 정한 별호라고 명기하고 있기 때문에, 성종 이후부터 충주라는 공식 명칭과 함께 별칭으로 사용되었다고 할 수 있다. 충주를 대원이라 부른 사례가 너무 단편적이고 부족하기 때문에 유래를 확인하기는 어렵고, 다만 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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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55년(고종 42) 충청북도 충주시 수안보면 미륵리 하늘재에서 충주 정예병이 몽고군을 크게 격파한 전투. 대원령은 삼국시대는 계립령·마골재, 고려시대는 대원령, 지금은 하늘재라 불리는 고개이다. 지금의 충주시 남쪽에 있는 고개로 충청북도와 경상북도의 경계를 이루는 지리적인 요충지이다. 이 때문에 대원령 일대는 충주 및 월악산과 연결되어 몽고군과의 중요한 격전지가 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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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충주시에서 활동하고 있는 한국 불교 27개 종단의 하나. 대한불교 법화종의 소의경전(所依經典)은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이며, 본존은 십계만다라(十界曼多羅)이나 불상은 석가모니불을 봉안한다. 1946년 5월 혜일(慧日) 정각대사(正覺大師)가 고려 대각국사(大覺國師) 의천(義天)을 종조로 하고 법화도량인 무량사(無量寺)를 창건함으로써 시작되었다. 196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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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56년(고종 43) 4월 충청북도 제천시 한수면 송계리 덕주산성에서 충주민과 몽고군 사이에 있었던 전투. 고려와 몽고가 처음 접촉한 것은 1219년(고종 6) 고려가 강동성(江東城)에 있는 거란족을 평정할 때 몽고의 후원을 얻어 공동 작전을 취했을 때이다. 이 일을 빌미로 이후 몽고는 고려에 대한 은인을 자처하며 사신을 보내 막대한 공물을 요구하였다. 1225년(고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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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차달을 시조로 하고 류용량을 입향조로 하는 충청북도 충주시 세거 성씨. 시조 유차달(柳車達)은 고려 개국 공신으로 후삼국 통일 전쟁 당시 유주(儒州)[문화]의 호족이었다. 유차달의 8세손인 유경(柳璥)은 고려 고종 때 최의(崔誼)의 무신 정권을 무너뜨림으로써 왕정을 회복하는 데 일조하였다. 그 공으로 위사일등공신(衛社一等功臣)에 봉해졌으며, 유경(柳璥)의 고향인 유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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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충주시 수안보면 미륵리에 있는 고려 전기 절터. 미륵대원지는 중원 미륵리 사지 발굴 조사 중 옛 미륵리 안말마을이 있던 자리에서 확인·조사된 사원 터로서, 대규모 건물지가 동·서·남·북으로 회랑처럼 길게 연결되어 있는 것이 확인되었다. 미륵대원지는 『삼국유사(三國遺事)』에 나오는 ‘미륵대원(彌勒大院)’으로 추정된다. 미륵대원의 존폐 시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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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충주 지역의 민간에서 전승되고 있는 습속(習俗). 민속은 민중들의 삶속에 일상적·집단적·유형적으로 되풀이되어 누적된 지식·기술·행위 등의 총체적인 문화 현상이라고 일컬어지고 있다. 따라서 민속은 공간적·역사적·시간적 조건에 의해 형상화된 민간의 생활 양식이라고 할 수 있다. 충주 지역 민속의 배경은 다양한 측면에서 찾을 수 있다. 먼저 역사적으로 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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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시대부터 시작된 택견은 신라시대에는 화랑도로서 삼국을 통일하는 근간이 되었고, 고려시대에는 호국 무예로서 무과 시제의 정규 과목이 될 정도로 국가 차원에서 장려했던 무예였다. 그러나 조선시대에 이르러 숭문천무(崇文賤武) 사상으로 인해 쇠퇴하기에 이르렀으며, 한일합방 후에는 일제의 민족 문화 말살 정책으로 택견꾼들은 일제의 눈을 피해 산에서 수련해 왔다. 그동안 아무도 돌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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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7년(고종 4) 박달현에서 고려군이 거란족을 크게 물리친 전투. 박달현 전투는 몽고군에게 쫓겨 압록강을 건너 고려에 침입한 거란족이 충청도 이남으로 남하하는 것을 막고자 박달현에서 벌인 전투이다. 박달현은 충청북도 제천시 봉양읍 원박리와 백운면 평동리의 경계에 있는 지역이다. 12세기 말 몽고 초원에서 일어난 몽고제국은 13세기에 들어 강성해지면서 금나라를 압박하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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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후기 충주목사를 역임한 문신. 본관은 춘천(春川). 아호는 동보(東甫), 자는 혁지(革之). 박씨의 시조 박혁거세(朴赫居世)의 40세손이며, 신라 제54대 경명왕의 일곱째 아들인 강남대군(江南大君) 박언지(朴彦智)의 11세손이다. 박항은 고려 고종 때 과거에 급제하였다. 개경(開京)에 있을 때 몽고군의 침입을 받아 춘천의 백성들이 격렬하게 항전하다가 전멸했을 뿐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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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충주시 동량면 하천리에서 충주 정토사지 법경대사탑비와 관련하여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 정토사는 신라 후기에서 고려 전기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된다. 법경대사가 이 절의 주지가 되어 많은 제자들을 양성하다가 941년(태조 24)에 입적하였고, 그의 뒤를 이어 홍법대사가 후학들을 지도하였다. 보물 제17호인 충주 정토사지 법경대사탑비는 정토사터에 전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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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충주시에 있는 불교의 예배 대상을 조성한 조각상. 불상(佛像)이란 불교의 교리에 의한 예배 대상을 석재나 금속 또는 흙이나 나무 등의 시각 매체를 통하여 조성한 조각상을 말한다. 엄격한 의미로는 붓다 즉, 여래(如來)의 존상만을 의미하나, 넓은 의미로 보살상·천왕상·명왕상·나한상 등 불교의 모든 예배의 대상을 포함한다. 이들은 재질에 따라 석불·마애불·금동불·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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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충주시에 있는 사찰의 유지(遺址).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 충주 지역에 있던 사찰은 『고려사(高麗史)』·『세종실록(世宗實錄)』·『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을 비롯한 각종 지리지에 그 사찰 명이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이들의 대부분은 없어지고 절터만이 남아 있다. 이 외에도 많은 절터가 있으며 그곳에서 나오는 명문의 와편을 통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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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원성은 고구려가 평양 천도 후 남진을 계속하여 5세기 전반 충주 지역을 점령하고 설치한 수도 다음 가는 부도(副都)였다. 고구려의 남방 경영 책원지이자 신라 공격의 전초기지였다. 충주 고구려비는 이러한 고구려 남진 정책의 성공을 기념하는 비로, 한반도에 남아 있는 유일한 고구려비이기도 하다. 고구려가 충주에 국원성을 설치하여 고구려 영역으로 편입한 것은 충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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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충주시 주덕읍에서 삼방리와 관련하여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 충주시 주덕읍에 삼방리라는 자연마을이 있다. 이 마을을 삼방리라고 부르게 된 것은, ‘배극렴이 은거해 있을 때 이성계가 이곳을 세 번 찾았다’고 한 데서 비롯되었다. 1980년 한국정신문화연구원(현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간행한 『한국구비문학대계』3-1에 수록되어 있는데, 이는 김영진(金榮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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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후기 충청북도 충주 출신의 문신. 본관은 충주(忠州). 호는 화원(花園). 할아버지는 홍양부원군(洪陽府院君)에 추봉된 석양선(石良善)이고, 할머니는 조선 태조(太祖)의 이모인 최씨(崔氏)이며, 아버지는 중랑장(中郞將)을 역임한 석천을(石天乙)이다. 형은 조선 건국 후 한성판윤을 지낸 석수명(石壽明)이다. 형은 홍주(洪州)로 분관(分貫)하였다. 석여명은 고려 후기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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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후기 충청북도 충주 출신의 문신. 본관은 충주(忠州). 슬하에 좌복야(左僕射)를 지낸 석천보(石天補)와 석천경(石天卿), 석천기(石天琪) 3남을 두었다. 석주(石胄)는 충렬왕의 총애를 받게 되자 교만과 횡포가 지나쳐서 많은 사람들로부터 지탄의 대상이 되었다. 일찍이 시사(侍史) 김필위(金必爲)를 미워하여 길에서 만나 구타하여 욕을 보인 적도 있었다. 1303년(충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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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 충주사록(忠州司錄)을 지낸 정도전이 고려의 멸망과 조선의 개국에 대한 감회를 노래한 시조. 단시조 형태의 평시조로, 초장에서 변함없는 산천의 모습을, 중장에서 망국에 대한 안타까움을, 종장에서 새로운 왕조에 대한 애민 충정의 마음을 표현하였다. 선인교 내린 물이 자하동에 흐르니(仙人橋 나린 물이 紫霞洞에 흐르나니) 오백 년 왕업이 물소리뿐이로다(半千年 왕업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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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충주시에서 같은 성과 같은 본관을 갖는 세거 성씨. 성씨의 연원은 태조 왕건이 후삼국을 통일한 다음 전국의 군·현의 이름을 개정하고 개국 공신을 책봉했던 940년(태조 23)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고려 이전 고대국가에서는 성씨는 왕족과 극히 일부 중앙 귀족들만의 전유물이었다. 후삼국시대 성주, 장군, 촌주 등의 신분을 지니면서 지방 세력을 대표하던 지방 귀족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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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와 조선시대 충청북도 충주시에 있었던 특별행정구역. 부곡·향(鄕)·소(所)·처(處)·장(莊) 등의 지방 특별행정구역은 기원이 삼국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고려시대 부곡은 대체로 신라 말 고려 초에 후삼국 통합전쟁 중에 저항한 호족세력 지역의 주민들을 강제적으로 편성하면서 집중적으로 형성되었다. 후삼국 통합 후 고려는 이 지역들을 법제적으로 부곡제라는 행정구역으로 편성, 군현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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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전기 충청북도 충주 출신의 태조 왕건 후비. 본관은 충주(忠州). 아버지는 충주 지역 호족으로 내사령을 지낸 유긍달(劉兢達)이다. 고려를 개국한 이후 태조 왕건은 호족 세력과 혼인 관계를 통하여 세력 기반을 공고히 하고자 했다.이런 이유로 충주 지역 호족의 딸이었던 신명순성태후는 918년(태조 1) 태조 왕건의 제3비가 되었다. 신명순성태후는 태조 왕건과의 사이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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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충주시 엄정면 신만리에서 신털봉과 관련하여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 엄정면 신만리 탄방부락의 성마루마을에서 남동쪽으로 600m를 가면 주막거리가 나온다. 이곳에서 보면 신털봉이란 낮은 산봉우리가 있고 그 맞은편에 큰 산소가 보이는데 이것이 양정승의 묘다. 「신털봉」 전설은 양정승의 장례 날 마침 비가 와서 조객들의 신발에 흙이 묻어 묘지 건너편 언덕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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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충주시 노은면 신효2리 진골에 있는 고려시대 유물산포지. 노은면에 대한 역사적인 기록은 고려시대부터 확인된다. 몽고가 고려를 침입할 때 천룡산성에서 몽고병과 싸우다가 힘이 부족하여 항복한 기록이 나온다. 조선시대에는 노은면에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 보련사에 대한 기록이 보인다. 『조선왕조실록』의 세종 6년(1424) 4월 5일의 기록에, 불교를 교종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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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충주시 중앙탑면 탑평리 충주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고려시대 동경. 동경은 구리에 주석, 아연 등을 섞은 합금으로 만든 거울로, 청동기시대부터 만들기 시작하여 역사시대에도 그 모양과 형태를 바꾸어가며 만들어졌다. 얼굴을 비추는 면은 반질반질하게 만들었고, 뒷면에는 꼭지가 달리거나 여러 가지 무늬 및 길상어 등을 새겨 장식하였다. 고려시대에 들어오면서 동경은 매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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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행을 시조로 하고 권천을 입향조로 하는 충청북도 충주시 세거 성씨. 안동권씨 시조 권행(權幸)은 신라 말 고창(현 안동)의 별장(別將)으로 있다가 고려 창업에 공을 세웠다. 권행의 성씨는 본래 김씨였으나 삼한벽상공신에 오르고 태조 왕건으로부터 권씨 성을 하사받은 이후 후손들이 권행을 시조로 하고 안동을 본관으로 삼게 되었다. 안동권씨는 고려시대에 문과 급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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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전기 예성군에 봉해졌던 충주양씨 시조. 본관 충주(忠州). 탐라국왕 양을나(梁乙那)의 후손으로 충주양씨의 시조이다. 양능길(梁能吉)은 고려가 건국되고 후삼국이 통일될 때 공을 세워 삼중삼한대장군에 오르고 예성군에 봉해졌다. 본래 양능길은 제주양씨였으나 예성(중원소경의 별칭)을 식읍으로 하사받으면서 후손들이 양능길을 시조로 하고 940년(태조 23) 중원소경이 충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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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광을 시조로 하고 이주를 입향조로 하는 충청북도 충주시 세거 성씨. 양성이씨는 이수광(李秀匡)을 시조로 한다. 이수광은 송나라 출생으로 고려 문종 때 귀화하여 양성군에 봉해지고 이후 후손들이 이수광을 시조로 하고 양성을 본관으로 삼게 되었다. 고려시대에는 이부상서를 역임한 이신정(李臣靖) 등 20여 명의 인물을 배출했고, 조선시대에는 문과 급제자 35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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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 충청북도 충주 출신의 문신. 본관은 충주(忠州). 자는 경지(敬之), 호는 유정(柳亭). 고려 통합삼한대장군(統合三韓大將軍) 양능길(梁能吉)의 15세손이다. 증조할아버지는 양무(梁茂)이고, 할아버지는 양환(梁煥), 아버지는 현령 양숙(梁肅)이다. 외할아버지는 윤정신(尹挺莘), 장인은 민사정(閔思正)이다. 1396년(태조 4) 생원시에 합격하고, 1405년(태종 5)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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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선문을 시조로 하고 허초를 입향조로 하는 충청북도 충주시 세거 성씨. 양천허씨는 허선문(許宣文)을 시조로 한다. 허선문은 가락국 김수로왕의 비 허황옥(許黃玉)의 30세손으로 공암현(현 김포시)에 거주하면서 농사를 지어 거부가 된 인물이다. 고려 태조 왕건에게 식량과 마필을 지원하여 후백제 견훤과의 전투에서 승리하는데 공을 세워 공암촌주에 봉해지면서 공암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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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충주시 주덕읍 삼청리와 괴산군 불정면 삼방리에 걸쳐 있는 산. 어래산에는 이태조에 얽힌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공민왕으로부터 남달리 총애를 받던 배극렴(裵克廉)은 왕의 시역사건이 일어나자 정사에 뜻을 잃고 그 부인과 함께 충주 고을로 낙향하였는데, 그가 어느 곳에 은거하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그 당시 좌우군 도총사였던 이성계가 왕실을 장악하게 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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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충주시 주덕읍 삼청리에서 삼방리에 있는 어래산과 관련하여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 「어래산 전설」은 주덕읍 삼청리에 있는 해발 387m의 어래산에 깃든 지명유래담이다. 어래산이라는 명칭은 배극렴이 이 산에 은거를 하고 있었는데, 이태조가 배극렴을 찾아 왔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1982년 충청북도에서 간행한 『전설지』에 실려 있는데, 당시 주덕읍 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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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충청북도 충주 지역에 설치된 교통·통신제도. 역은 공문서의 전달, 관리의 왕래와 숙박, 관물의 수송을 돕기 위해 중요 교통로에 설치하였다. 삼국시대 이래로 설치하여 고려 성종 대에 이르러 전국 525개소의 역을 22개의 역도(驛道)로 편성하여 역참을 조직했으며, 역의 중요도에 따라 역정호(驛丁戶)의 수와 공문서 전달 방식을 정하였다. 각 역에는 역마(驛馬)·역장(驛長)·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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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사시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충청북도 충주의 역사. 지리상으로 한반도의 중앙에 위치한 충주는 선사시대부터 다른 지역에 비해 사람이 살기에 좋은 곳이다. 충주시 용탄동과 조동리 등의 유적과 그 유적에서 출토된 유물들이 이를 시사해주고 있다. 이들 유적과 유물은 선사 문화의 시원과 이동, 전파 및 취락의 형태를 밝혀 주는 중요한 자료이다. 이들 선사 유적이 형성된 배경은 어업에 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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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전기의 문신. 본관은 파주(坡州). 염상은 고려 태조 왕건(王建)을 도와 개국2등공신에 봉해졌으며, 940년(태조23)에는 재상직에 있으면서 왕규(王規), 박수문(朴守文)과 함께 태자 왕무(王武)[훗날의 혜종(惠宗)]를 도와 정무를 보살폈고 왕건의 임종을 곁에서 지켰으며 왕건이 죽자 유명(遺命)을 내외에 선포하는 중책을 맡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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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종은을 시조로 하고 정경연을 입향조로 하는 충청북도 충주시 세거 성씨. 영일정씨는 정종은(鄭宗殷)을 시조로 한다. 정종은은 신라 6촌 중 취산진지촌의 촌장 지백호의 후손으로 신라 태종무열왕 때 사정부간관을 지내고 김유신과 함께 삼국 통일에 공을 세운 인물이다. 정종의 후손 정의경(鄭宜卿)이 영일현 호장을 지내고 영일백에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이 영일을 본관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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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 충청북도 충주시의 별칭. 『고려사(高麗史)』에는 충주의 다른 이름으로 예성(蘂城)과 대원(大原)이 등장한다. 그 중 예성은 대몽항쟁의 공적과 관련된 것으로 보이는 별호인데, 이후부터 충주라는 공식 명칭과 함께 별칭으로 불렸다. 현재까지도 충주의 학교·단체 등의 이름에 많이 사용되고 있다. 『고려사』에는 예성에 “1255년(고종 42)에 다인철소(多仁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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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충주시 소태면에 속하는 법정리. 본래 충주군 성태양면(省台陽面) 지역으로 청계산(淸溪山) 밑에 소재하여 지대가 매우 높아 오랑골·오량골·오량동이라 하였다. 또는 마을이 오방(午方)을 향해서 있다고 하여 오향동(午向洞)이라고도 하였다. 1914년에 행정구역 개편 때 오량동(五良洞)이라 하였다. 1760년의 『여지도서(輿地圖書)』 충원현조에 의하면, 원래 이 지역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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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후기 충청북도 충주 지역에서 약탈을 일삼았던 일본 해적의 침입 사건. 왜구는 일본 남북조의 혼란기에 생겨난 집단으로 13세기에서 16세기에 걸쳐 떼를 지어 수시로 바다를 건너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중국 대륙 연안까지 침입하여 약탈과 살인 등 만행을 일삼았던 해적을 말한다. 우리나라의 경우 왜구는 고려시대 충정왕(忠定王)[1349~1351] 때부터 우왕(禑王)[1375~13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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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충주 지역에서 행해지는 공자의 사상과 관련한 학문과 의례 및 활동 일반. 유교는 공자(孔子) 및 맹자, 증자 등 유가(儒家)의 정치 사상과 학문 수양, 그리고 의례 등의 가르침을 실천하려는 현세적 사상이자 종교이다. 충주에서 유교 문화가 성립, 전개되었음을 보여주는 대표적 인물은 신라 때의 문장가로 유명한 강수(强首)이다. 김생(金生)은 명필로도 유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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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전기 충청북도 충주 출신의 문신. 유권열은 고려 태조 왕건(王建)의 제3왕후 신명순성왕태후의 친가인 충주유씨 집안 출신으로 태조 즉위 초 광평시랑(廣評侍郞)이 되었다. 당시 궁예(弓裔)의 시중직을 역임했던 구진(具鎭)이 나주도대행대시중(羅州道大行臺侍中)에 임명하여 나주로 떠나게 되었다. 구진이 사양하려 하자 유권열은 “상으로써 선을 권장하고 벌로써 악을 징계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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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신라 후기와 고려 전기 충청북도 충주 출신의 호족. 본관은 충주(忠州). 딸이 고려 태조 왕건(王建)의 셋째 부인인 신명순성태후(神明順成太后)이다. 유긍달은 통일신라 말 충주를 대표하는 유력한 호족이었다. 900년(효공왕 4)에 왕건이 궁예(弓裔)의 부장으로서 지금의 충주, 청주, 괴산 등지를 공격하여 청길(淸吉), 신훤(莘萱)의 세력을 평정할 때 유긍달과 인연을 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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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중기 충청북도 충주 출신의 문신. 충주 정토사지 법경대사탑비의 음기(陰記)에 ‘신성아찬(新城阿湌)’이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아찬’은 신라의 직함이다. 고려 광종의 외가인 충주유씨 가문 출신의 인물로서, 광종의 신임을 얻어 조정의 중책을 맡아 활약하고 최고위 관위에 올랐던 명신(名臣)이다. 시호는 광위(匡衛)이고, 994년(성종 13) 서필과 함께 광종의 묘정에 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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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전기 충청북도 충주 출신의 문신 유징필은 고려 광종(光宗)의 외가인 충주유씨(忠州劉氏) 가문 출신으로 1020년(현종 11) 국자좨주[國子祭酒]가 되어 복시(覆試)를 주관하였다. 1022년(현종 13) 정월 한림학사겸비서감(翰林學士兼秘書監)이 되었으며 다음 해인 1023년(현종 14) 3월 거란에 사신으로 파견되어 전란으로 어려워진 양국 간의 현안 문제를 푸는데 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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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충주시 안림동에 있는 고려시대 절터. 의림사지는 충주시의 동쪽 외곽에 위치한 마즈막재 아래에 세워진 고려시대의 사찰 터로서, 그동안 지명에 따라 안림동 사지, 이궁지(離宮址), 대궐 터 등으로 불렸다. 그러나 의림사지에 대한 문헌 기록과 자료가 전혀 없어 창건과 폐사 시기에 대해서는 확인되지 않았다. 사찰의 이름이 확인된 것은 1989년 충주대원고등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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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충주 지역에서 국가가 위급할 때 백성이 스스로 조직했던 자위군. 의병은 어떤 특정한 시기에 국한되는 개념이라기보다는 우리 역사의 전 시기에 걸쳐 외침이 있을 때마다 일어났던 민병대를 포괄적으로 지칭하는 개념으로 이해된다. 하지만 용어가 같다는 이유로 삼국시대부터 고려와 조선을 거쳐 한말 의병전쟁에 이르기까지 쉼 없이 일어났던 다양한 성격의 의병이 동일하게 이해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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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충주 지역의 일반 복식 생활. 옷은 사람들이 추위나 더위를 피하고 몸을 보호하기 위해서 만들어졌다. 원시시대에는 짐승 가죽이나 나무의 잎새나 줄기를 엮어서 간단히 몸을 가렸지만, 문명의 발달로 옷감을 짜서 옷을 만들어 입게 되었고 나중에는 몸을 보호하기 위한 기능을 넘어 예절이나 신분에 따라 모양·옷감·색깔 등이 달라졌다. 또한 보통 때 입는 평상복과 의식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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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충주시 중앙탑면 탑평리에서 출토된 조선 중기 복식. 조선시대에는 임진왜란(1592~1598)을 계기로 복식 제도에 새로운 변화가 생기게 되었다. 묘주(墓主)인 이응해(李應獬)[1547~1626]는 임진왜란 전후의 무관으로, 훈련도정을 거쳐 전라좌수사, 온성부사, 제주목사, 전라병사 등을 역임하고 당상관으로 평양판관을 지낸 사람이다. 이응해의 묘에서 출토된 복식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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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 충청북도 충주시에 있었던 특별행정구역. 고려시대 부곡은 대체로 신라 말기와 고려 전기 후삼국 통합전쟁 중 저항한 호족세력 지역의 주민들을 강제적으로 편성하면서 집중적으로 형성되었다. 후삼국 통합 후 고려는 이 지역들을 법제적으로 부곡제라는 행정구역으로 편성, 군현제의 하부기구로 예속시키고 군현제를 통해 간접 지배하는 방식을 취하였다. 12세기 이후 고려 사회의 변동과정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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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후기 고종 대에 충청북도 충주 지역에 있었던 지방 행정구역. 고려의 지방 행정제도는 군현 밑에 촌(村)이 있어 토착인인 촌장의 자치제로 운영되었다. 이들 촌에는 양인 신분의 촌민이 거주했고, 이들 대부분은 농업에 종사하는 농민이었다. 이와는 별도로 천민의 집단 거주지로서 향(鄕)·소(所)·부곡(部曲) 등의 특별 행정구역이 있었다. 그중에서 소(所)는 국가에서 필요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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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주 출신이거나 충주 지역과 연관이 있는 사람을 ‘충주 사람’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충주는 국토의 중심이었고 예부터 사통팔달의 도시였기에 많은 인물이 배출되었다. 또한 충주 지역 자체에서 인물이 잘 성장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격려하는 풍토가 조성되어 있었음도 한 몫을 한 것으로 여겨진다. 다른 고장과 비교하여 손색이 없는 면면을 지녔기에 충주를 인물의 고장이라 칭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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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도를 시조로 하고 이신효를 입향조로 하는 충청북도 충주시 세거 성씨. 전의이씨의 시조 이도(李棹)의 본래 이름은 이치(李齒)다. 이도는 후백제를 정벌하기 위해 범람하는 금강을 건너려는 고려 태조 왕건을 도운 공으로 왕건으로부터 도(棹)라는 이름을 하사 받았다. 또한 삼한개국공신에 오르고 전의후에 봉해지면서 전의(현 충청남도 연기군 전의면)를 식읍으로 하사받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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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충주시 동량면 하천리에 있는 고려시대 절터. 정토사지에는 보물 제17호인 충주 정토사지 법경대사탑비(忠州 淨土寺址 法鏡大師塔碑)가 위치하고 있었다. 정토사와 관련된 문헌 기록은 많지 않다. 그러나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과 『충청도읍지(忠淸道邑誌)』에 약간의 기록이 남아 있어 사찰의 연혁을 살피는 데 도움을 준다. 『신증동국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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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탑은 9세기에 접어들면서 옛 백제·고구려 지역에서 등장하는 지방 세력의 반발과 반신라적 민심의 대두를 잠재우고 국가적 불안을 해소하기 위해 호국적인 불교의 힘을 빌려 세운 비보적 의미를 지닌 원탑이다. 중앙탑이 충주에 건립된 이유는 그 위치가 신라 영토의 중앙에 해당되어 건탑의 목적을 널리 떨치기에 좋은 지리적 조건을 갖추고 있다는 점, 그리고 수도 다음가는 소경(小京)이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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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신라시대 충청북도 충주 지역에 설치된 지방 행정구역. 6세기경 신라는 고구려가 차지하고 있었던 충주 지역을 빼앗은 뒤 그곳에 국원소경을 설치하였다. 7세기에 접어들어 한반도에서는 고구려·백제·신라 3국과 중국의 당, 일본까지 관련된 격렬한 전쟁이 벌어졌다. 그 결과 신라는 백제를 통합하고 한반도의 중남부 지역을 장악했으며, 고구려는 당에 의해 멸망되고 그 땅에서 발해가 건국되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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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5년(성종 14) 충청북도 충주 지역에 있었던 지방 행정구역. 후삼국을 통일한 고려 태조는 전국을 통일된 국가체제로 다잡기 위하여 지방 행정구역에 대한 일대 개편을 단행하지만 중앙에서 전국을 대상으로 목민관을 파견하지는 못하였다. 이 후 983년(성종 2) 12목이 설치되어 목사가 파견된 데 이어, 995년 7월에 중앙정부에 의한 실질적인 지방통치를 시행하기 위한 목적에서 고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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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충주시에서 매년 중원 문화와 관련하여 열리는 학술 행사. 중원 문화라는 말은 충주 지역을 중심으로 한 중원 문화권 지역에 형성되었던 역사·문화·사회·정치·경제 등 모든 상황을 총체적으로 포괄하는 개념으로 사용된다. 보통 중원이라 하면 중국을 지칭하는 것으로 알려졌으나, 사실은 과거 통일신라시대부터 나라의 중심이라는 개념으로 중원경, 중원소경 등의 지명으로 사용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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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신라 후기와 고려 전기 충주유씨 등 호족이 충주 지역을 다스리기 위해 설치한 관부(官府). 도속이관(道俗二官)의 기록은 보물 제17호로 지정된 충주 정토사지 법경대사탑비의 음기에 나타난다. 충주 정토사지 법경대사탑비의 주인공인 법경대사는 당나라에 가서 구봉산(九峯山) 도건대사(道乾大師)에게 심요(心要)를 받고 10년 동안 각지를 두루 편력하다 924년(태조 7) 46세로 귀국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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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 충청북도 충주시의 별칭. 고려시대 금석문인 충주 정토사지 법경대사탑비와 사자빈신사지석탑(師子頻迅寺址石塔)에는 충주 지역을 가리키는 명칭으로 ‘중주(中州)’가 등장한다. 하지만 『고려사(高麗史)』 등의 역사서에는 중주에 대한 기록이 전혀 보이지 않기 때문에, 공식적인 명칭이라기보다는 민간에서 사용한 별칭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주(州)’는 신라 이래의 지방 행정구역 명칭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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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충주시 동량면 지동리에 있던 신석기시대 에서 초기 철기시대의 유물산포지. 동량면 지동리는 제천과 접한 지역으로 동량면 하천리 정토사지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생각된다. 정토사지는 고려 초에 이미 대가람을 이루어 법경대사나 홍법국사가 주석했으며, 고려 말에는 고려의 외사고가 한동안 머물렀던 곳이다. 지동리는 지금은 흔적조차 남아 있지 않으나, 닥나무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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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충청북도 충주 출신의 무신. 본관은 충주(忠州). 자는 수지(受之). 고려의 명장 충의군(忠義君) 지용기(池勇寄)의 후손이며 사과 지경담(池景湛)의 아들이자 우암 송시열의 외조부이다. 무과에 급제하였으며 1627년(인조 5) 정묘호란 때 공을 세워 절충장군(折衝將軍)에 올라 용천부사가 되었으나 모함을 당해 의주에 충군(充軍)되었다. 배소(配所)에 있을 당시 가도에 주둔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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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충주시 직동에 있는 고려 전기 무덤군. 고려 전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며, 모두 도굴되고 심하게 파괴된 것을 정리하기 위한 조사를 하였다. 할석으로 축조한 구덩식 돌덧널무덤이며, 내부에서 관정(棺釘)이 나오고 있어 돌덧널 안에 따로 목관을 사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남산에서 서남으로 뻗어내린 짧은 두(A. B) 능선에 15기(A지구 9기, B지구 6기)의 고묘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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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충주시에서 동성동본의 사람들로 형성된 촌락. 집성촌은 동성동본(同姓同本)의 성씨집단이 대대로 모여 사는 촌락을 의미한다. 집성촌은 삼국시대 또는 고려시대로까지 거슬러 올라가지만, 조선 초기부터 본격적으로 형성되기 시작하였고 특히 17세기 이후 집중적으로 형성되었다. 17세기 이후 적장자 중심의 상속제도의 변화, 주자가례(朱子家禮)의 보급, 예학(禮學)의 발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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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충주시 대소원면 매현리에 있는 조선시대 사당. 조선시대 문신인 삼탄 이승소의 위패를 봉안하고 배향하고 있는 사당으로, 1904년 건립되어 1934년 중건되었다. 이승소는 조선 성종 때의 명신(名臣)이며, 호는 삼탄, 시호는 문간(文簡)이고, 고려의 시중(侍中) 이춘부(李春富)의 현손으로 인품이 진중하였다고 한다. 1447년(세종 29)에 문과에 장원 급제하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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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후기와 조선 전기 충청북도 충주 출신의 문신. 본관은 충주(忠州). 충주최씨 6세손으로 아버지는 보문각직제학을 지낸 최원유, 어머니는 우왕의 장인 철성부원군 이림(李琳)의 딸이다. 최염(崔濂)은 고려 충혜왕 때 문과에 급제하고 관직에 올랐다. 1389년(공양왕 1) 판밀직부사 재직 중에 창왕이 폐위되고 공양왕이 즉위하면서 이림과의 관계로 인해 유배되었다가 곧 풀려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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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후기 충주목사를 역임한 무신. 본관은 통천(通川). 자는 호보(浩甫). 호군(護軍) 최녹원(崔祿元)의 아들이다. 세종조에 파저강(婆猪江)의 야인을 정벌한 공으로 세조 묘정에 배향된 최윤덕(崔潤德)이 아들이며, 그 외에도 세 아들을 두었다. 아버지의 전공으로 공민왕 때 충용위산원(忠勇衛散員)에 기용된 후 여러 벼슬을 거쳐 전공총랑(典工摠郞)이 되었다. 1385년(우왕 11) 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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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전기 충주목사를 역임한 문신. 본관은 창원(昌原). 자는 직재(直哉). 고려 태조를 도운 공신 최준옹(崔俊邕)의 6세손이다. 아버지는 문하시랑중서문하평장사(門下侍郞中書門下平章事) 최석(崔奭)이다. 최유청은 예종 때 문과에 급제하였으나 스스로 유자(儒者)는 고학(古學)을 배운 후에 벼슬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여 문을 닫고 책 읽기에 열중하며 벼슬을 사양했다. 뒤에 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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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충주시 수안보면 미륵리에 있는 고려시대 절터. 충주 미륵대원지는 1963년에 고고미술사학회(현 한국미술사학회)에 의해 고려 석실[돌방] 사원지로 소개되었고, 1965년에는 경주 석굴암 복원을 위한 자료로 제시되었다. 일제강점기인 1935년 5월 24일에 오층석탑과 석불입상이 각각 국보 제166호와 제167호로 지정되었고, 1963년 1월 21일에 각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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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충주시 신니면 문숭리에 있는 고려시대 원당터. 충주 숭선사는 고려 광종(光宗)의 어머니인 신명순성왕태후(神明順聖王太后) 유씨(劉氏)의 원당(願堂)으로, 본래 사지에는 당간지주만 남아 있고 주변은 경작지화 되어 크게 주목받지 못하였다. 이후 충주 숭선사지에서 많은 양의 기와가 출토되고, 그중 ‘숭선(崇善)’명의 기와가 출토되면서 주목을 받게 되었다. 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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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충주시 신니면 문숭리 숭선마을에 있는 고려 전기 석재 당간지주. 충주시 신니면 문숭리 숭선마을 충주 숭선사지 입구에 남아 있는 유적이다. 숭선마을 뒤쪽으로 형성된 골짜기에는 오래전부터 많은 기와편과 자기편 등이 출토되었다. 이에 따라 대규모의 건물이 있었음을 알 수 있었다. 1981년경 사지에서 명문 기와가 출토됨에 따라 숭선사(崇善寺)임이 확인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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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충주시 동량면 하천리 정토사지에 있던 고려 전기 홍법국사 탑비. 홍법국사는 통일신라 선덕왕대에 태어나 12세의 나이에 출가하였고, 당나라를 다녀온 뒤 선(禪)을 크게 일으켜 국사 칭호를 받았다. 시호를 홍법, 탑명을 실상(實相)이라 하였다. 정토사에 머물다 입적하자, 고려 목종이 시호를 홍법, 탑명을 실상(實相)이라 내려주러 탑비를 건립하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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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충주시 성내동에 있는 조선 후기 축성에 대한 사적비. 1866년(고종 3)에 병인양요를 겪은 뒤 전국의 성첩과 군기를 보수하여 유사시에 대비하라는 조칙이 내려오자 1869년 2월부터 읍성을 개축하기 시작하여 10개월 만인 11월에 준공하였다. 이를 기념하기 위하여 화강암 충주 축성사적비를 세웠으며, 앞면에는 축성 연대와 성의 크기, 문루의 크기를 상세히 기록하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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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의 대몽항쟁은 1231년(고종 18)부터 1273년(원종 14) 삼별초군의 패망에 이르는 40여 년이란 장구한 기간 동안 전개되었다. 1225년(고종 12) 몽고 사신 저고여(著古與)의 피살 사건을 계기로 국교가 단절된 뒤, 몽고는 1231년(고종 18) 조공 거절 및 저고여 피살에 대한 보복으로 고려에 대한 제1차 침입을 필두로 1254년까지 8차에 걸쳐 한반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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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주 지역은 우리나라 3대 철산지의 하나로 고대부터 철광산이 개발되어 철광석을 캐고, 쇠를 뽑고 녹이고 두드려 각종 무기나 농구 등의 연모를 만들던 쇠부리업이 발달했던 곳이다. 고대 국가의 힘의 상징인 철을 확보하기 위해 삼국은 공히 충주 지역에 공을 들였으며 충주 지역을 확보한 국가가 항상 강력한 힘을 발휘하였다. 충주는 질 좋은 철을 생산하던 자원의 보고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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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서예가 서동형이 충주와 관련하여 전해 오는 한시를 엮은 책. 충주에는 충주 출신의 위대한 유학자와 문인 및 예술가들이 충주에 관해 읊은 시가 많이 남아 있다. 또한 충주에서 생활했던 감사나 목사의 시와 남북 교통의 요충지였던 충주를 거쳐 간 많은 문인 명사들이 읊은 시들이 남아 있다. 그러나 이들의 작품은 개인 문집 등에 실려 있어 일반인들이 찾아보기란 쉽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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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 충청북도 충주 지역에 있었던 지방 행정구역. 현재 충청북도 충주 지역은 신라의 중원경에서 고려 940년(태조 23년) 충주(忠州)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충주라는 이름은 이때부터 사용되기 시작하는데, 983년(성종 2년)에 전국에 12목(牧)을 설치하면서 처음으로 이곳에 목(牧)이 설치되었다. 이후 고려의 지방제도 개편에 따라 부분적으로 행정 단위의 명칭이 변경되기도 하였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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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후기부터 조선 중기까지 충청북도 충주 지역에 왕실의 중요한 서책과 문서를 보관하였던 창고. 충주는 역사상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관방(關防)으로서 중요한 요충지이고 한강의 수운(水運)을 이용한 교통의 요지였다. 이 때문에 외적의 방어에 용이하고 교통이 편리하며 내륙 깊숙이 위치한 도시인 점이 고려되어 사고(史庫)가 설치되었다. 사고 관리는 충청도관찰사와 충주목사의 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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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53년(고종 40) 10월부터 12월까지 충주산성에서 충주민이 몽고군의 침입을 물리친 전투. 몽고는 그 동안 고려를 네 차례나 침략했지만 고려 왕실의 환도를 실현시켜 실질적인 항복을 받아내는 데 실패하자, 1253년 7월 야굴(也窟)을 대장으로 제5차 침입을 감행하였다. 1253년 7월 고려를 침입한 몽고군 수십만은 고려 동부와 서부 지역을 유린한 뒤 남하하여 양광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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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린을 시조로 하고 충주를 본관으로 하는 충청북도 충주시 세거 성씨. 충주석씨는 석린(石隣)을 시조로 한다. 『충주석씨세보』에 의하면 석린은 1174년(명종 4) 조위총의 난을 평정한 공으로 예성군에 봉해졌다. 이후 후손들이 석린을 시조로 하고 충주(옛 이름은 예성)를 본관으로 삼게 되었다. 한편으로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등 옛 문헌에서는 고려 충렬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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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31년 12월 충주성에서 노군과 잡류별초를 중심으로 한 충주민이 몽고군을 물리친 전투. 몽고의 지나친 조공 요구로 고려와 몽고의 화의가 깨어지자 몽고는 저고여(箸古與) 살해 사건을 핑계로 1231년 8월 고려를 침입하였다. 1231년 8월 살리타[撒禮塔]가 이끄는 몽고군은 압록강을 건너 함신진(咸新鎭)[지금의 의주]을 함락하고, 평안도와 황해도 일대를 거쳐 12월 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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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북부에 위치한 시. 충주시는 중부 내륙 광역권의 거점 도시로 수도권에 인접해 있고 풍부한 용수로 기업하기 좋은 산업 기반이 구축된 도시이다. 국토의 중앙에 위치한 전국 교통망의 중심이며, 남한강 유역을 중심으로 한 중원 문화의 중심 도시이자, 충주호와 월악산, 수안보온천·앙성온천·문강온천이 있는 국제적인 관광 도시이다. 충주시를 상징하는 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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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능길을 시조로 하고 충주를 본관으로 하는 충청북도 충주시 세거 성씨. 충주양씨는 양능길(梁能吉)을 시조로 한다. 양능길은 본래 제주양씨였으나 고려 개국에 공이 있어 예성군에 봉해졌고, 이후 후손들이 양능길을 시조로 하고 충주(옛 이름 예성)를 본관으로 삼게 되었다. 봉작은 출신 지역이나 거주 지역과 연관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일반적이다. 시조 양능길이 예성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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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중익을 시조로 하고 어백평을 입향조로 하는 충청북도 충주시 세거성씨. 충주어씨는 고려 초 평장사를 지낸 어중익(魚重翼)을 시조로 한다. 어중익은 본래 지씨였는데 겨드랑이에 있던 세 개의 비늘 때문에 고려 태조 왕건이 어씨(魚氏)를 하사하였다고 전해진다. 어중익 이후 계보가 실전되었기 때문에 고려 말 성균진사를 지내면서 가세를 일으킨 어승진을 중시조 겸 1대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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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긍달을 시조로 하고 충주를 본관으로 하는 충청북도 충주시 세거성씨. 충주유씨는 유긍달(劉兢達)을 시조로 한다. 유긍달은 충주의 호족 세력으로 918년(태조 1) 딸 신명순성태후가 고려 태조 왕건의 제3왕비가 됨으로써 강력한 지방 세력으로서 뿐만 아니라 중앙 정부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왕실의 외척 세력으로서 성장할 수 있었다. 이후 후손들이 유긍달을 시조로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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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56년(고종 43) 4월 충주주성에서 고려군과 몽고군 사이에 있었던 전투. 고려와 몽고가 처음 접촉한 것은 1219년(고종 6) 고려가 강동성(江東城)에 있는 거란족을 평정할 때 몽고의 후원을 얻어 공동 작전을 취했을 때이다. 이 일을 빌미로 이후 몽고는 고려에 대한 은인을 자처하며 사신을 보내 막대한 공물을 요구하였다. 1225년(고종 12) 1월 몽고의 사자 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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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경을 시조로 하고 충주를 본관으로 하는 충청북도 충주시 세거 성씨. 충주지씨는 지경(池鏡)을 시조로 한다. 지경은 송나라 사람으로 960년(광종 11) 태학사로 고려에 와서 평장사를 역임했던 귀화인이다. 지경의 6세손 지종해(池宗海)가 고려 정종[1035~1046] 때 충주백에 봉해졌고 이후 후손들이 충주를 본관으로 삼게 되었다. 충주지씨는 특히 고려시대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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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 충청북도 충주 지역에서 시행된 지방 군제. 조선 전기의 지방군은 육수군(陸守軍)과 기선군(騎船軍)으로 대별되고, 육수군 안에는 일반 농민들이 군역으로 번상숙위(番上宿衛)하는 시위패(侍衛牌)와 영진군(營鎭軍), 수성군(守城軍) 등이 있었다. 영진군은 마병으로, 수성군은 주로 보병으로 편제되어 있었으며, 그 대우도 매우 열악한 상태였다. 이외에도 능이나 특수 지역을 방어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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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승을 시조로 하고 충주를 본관으로 하는 충청북도 충주시 세거 성씨. 충주최씨는 최승(崔陞)을 시조로 한다. 그러나 최승 이후 계보를 알 수 없어 고려 충선왕 때 판도판서·예문관대제학을 지낸 최공의(崔公義)를 중시조 겸 1세조로 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충주최씨는 고려시대에 크게 번창하여 문하시중을 지낸 최옥(崔沃)을 비롯하여 문하시랑을 지낸 최백청(崔伯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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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충청북도 충주 지역에서 충청도관찰사가 업무를 집행하던 관청. 충청북도 충주시에 두었던 충청감영에는 중앙의 6조를 그대로 옮긴 6방(이·호·예·병·형·공)을 설치하여 향리를 통해 감사가 도(道)의 사무를 집행하였다. 조선은 점차 국가의 기틀이 잡혀감에 따라 지방행정조직을 고려의 5도 양계에서 발전된 8도로 정비하였다. 조선의 8도는 경기·충청·전라·경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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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 충청북도 충주시에 있었던 특별행정구역. 부곡·향(鄕)·소(所)·처(處)·장(莊) 등의 지방 특별행정구역은 기원이 삼국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고려시대 부곡은 대체로 신라 말 고려 초에 후삼국 통합전쟁 중에 저항한 호족세력 지역의 주민들을 강제적으로 편성하면서 집중적으로 형성되었다. 후삼국 통합 후 고려는 이 지역들을 법제적으로 부곡제라는 행정구역으로 편성, 군현제의 하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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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충주 지역에 있는 예배의 주요 대상이 되는 불교 조형물. 탑은 탑파(塔婆)·불탑(佛塔)·부도(浮圖)·솔도파(窣堵婆) 등 다양한 명칭으로 불리었다. 탑은 재료와 성격에 따라 다양하게 분류된다. 재료에 따라서는 목탑·전탑·석탑·모전석탑·청석탑·금동탑·동탑·유리탑·철탑 등 다양하다. 성격에 따라서는 불사리탑(佛舍利塔)·표식탑(標式塔)·비보탑(裨補塔)·묘탑[부도]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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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립령(鷄立嶺), 겨릅산, 대원령(大院嶺), 한훤령(寒喧嶺) 등으로 불리는 하늘재는 영남과 기호를 연결하는 최초의 교통로로 알려져 있다. 『삼국사기』 권2 신라본기에 의하면 제8대 아달라(阿達羅)이사금 3년(156)에 개통시킨 교통로임을 알 수 있다. 또 다른 통로인 죽령(竹嶺)보다 2년 앞서 개통된 길이다. 이 길을 발판으로 한강 유역 진출이 가능하였고 고구려의 남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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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91년(충렬왕 17) 충주산성에서 고려군이 원의 반란 세력인 합단(哈丹)의 군대를 격퇴한 전투. 1287년(충렬왕 13) 4월 원(元)에서 흥안령(興安嶺) 동쪽을 지배하던 내안(乃顔)이 사심을 품고 동방의 여러 왕들을 충동질하여 반란을 일으켰으나 원 세조(世祖)의 친정에 의하여 토벌되었다. 1288년 초에 내안의 잔여세력인 합단이 막북(漠北)에서 다시 반기를 들었는데, 원이 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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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후기부터 고려 전기까지 충청북도 충주 지역에서 사회 변동을 주도하며 존재한 지방 세력. 신라 하대에는 중앙 귀족들의 정권 다툼으로 중앙 정부의 통제력이 약화됨에 따라 호족이라는 새로운 지방 세력이 대두하였다. 호족은 몇 가지의 부류로 구분된다. 중앙 귀족들의 정권 다툼에서 패배하여 지방으로 내려가 정착한 경우, 지방의 토착세력이던 촌주(村主)들이 성장한 경우, 청해진의 장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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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전기 충청북도 충주에서 활동한 승려. 홍법국사의 생전 활동 모습에 관해서는 어디에서도 그 기록을 찾아볼 수 없다. 다만 정토사홍법국사실상탑비(淨土寺弘法國師實相塔碑)가 전해지고 있어 비문의 내용을 통해 부분적이지만 그 생애의 일부를 어느 정도 확인해 볼 수는 있다. 그러나 비문마저도 마멸이 심하여 전문의 정확한 판독은 불가능한 상태이며 판독이 가능한 부분만을 토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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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주시 수안보면 미륵리, 하늘만 빼꼼이 열린 그 곳에는 돌부처가 산다. 6조각의 몸은 세월의 때가 덕지덕지 묻어 거무스름하지만, 하얀 얼굴은 슬그머니 웃음 지으며 그렇게 살고 있다. 머리에는 큰 갓을 쓴, 인체의 비례도 맞지 않는, 부처님을 묘사한 수법도 정밀하지 못한, 그래도 웃음 지으며 천년을 서있는 부처님이 산다. 왔다가는 숱한 사람들이 부처님을 향해 입방아를 찧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