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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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3월 11일부터 약 1개월 동안 충청북도 충주시에서 전개된 항일 독립운동. 일본 제국주의는 1910년 국권을 강탈한 뒤 폭압적인 무단 통치를 실시하였다. 한민족은 무단 통치 아래서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를 박탈당하였고, 민족 교육과 종교도 탄압받았다. 한편 회사령으로 민족 자본가의 성장이 막히고, 토지 조사 사업으로 많은 농민들이 소작농으로 전락하였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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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충주시 주덕읍 신양리에 있는 가족문제 상담소. 가족행복상담연구소 소장 홍연희는 목회 활동과 병행하여 약 15년 동안 가정과 육아, 청소년 문제에 대한 상담활동을 해왔다. 그러다가 2005년 2월 교회가 지역사회에 이바지할 방법을 모색하던 중 가정폭력, 성폭력 등 가족문제를 합법적인 절차를 통해 해결하고자 설치한 것이 가족행복상담연구소이다. 이기주의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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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4년 일본이 충청북도 충주시 중앙탑면 가흥 지역에 설치한 병참기지. 불법적으로 경복궁을 강점한 일본이 이후 동학농민군을 진압하고 청일전쟁을 수행하기 위해 가흥에 설치한 병참기지이다. 동학농민혁명이 발발하자 자국민 보호를 빌미로 대대적인 군대를 파견한 일본군은 1894년 6월 21일 경복궁을 무력으로 점령하였다. 이어 청국(淸國) 세력을 한반도에서 몰아내기 위해 6월 23일 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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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말기 충청북도 충주시 중앙탑면 가흥리에 있던 조창. 조선시대에는 전국에 9곳의 조창(漕倉: 세금으로 거둔 곡식을 보관하던 창고)을 두었는데, 가흥창은 그 중의 하나이다. 충주는 남한강이 흘러 수륙교통이 편리하여 일찍부터 도시가 발달하였고, 고려시대에는 남도 수군에 12창을 설치할 때 덕흥창이 설치되었던 곳이다. 덕흥창에는 판관을 두고 충주 부근의 조세를 수납하여 경창으로 수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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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4년 충청북도 충주 출신의 유생 이면재가 쓴 일기. 조선 말기 충주 지역(당시 청풍)에 살던 이면재(李冕宰)는 한말 의병장이자 유학자인 유인석 등과 교류하였다. 이면재는 의병을 일으킨 유인석을 뒤따라 1896년 6월부터 서울을 경유, 황해도·평안도를 거쳐 서간도로 가서 이듬해 1월 제천으로 되돌아올 때까지의 일정을 기록한 『서행일기(西行日記)』의 저자 이조승(李肇承)의 족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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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충주시에서 활동하는 그리스도교의 한 분파. 충주와 개신교와의 만남은 서울에서 충청도에 이르는 길목과 무관하지가 않다. 길은 곧 사람과 문물, 그 모든 것의 흐름이자 통로이기 때문이다. 경부선 철도가 놓이기 전 충청도는 남도와 경상도 그리고 서울을 잇는 길목으로 세 갈래 길이 있었다. 서울에서 한강을 건너 경기도 과천~시흥~수원~성환을 거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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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충주시 용두동에 있는 농업 특산품 제조업체. 충주의 농업 특산품을 가공한 각종 식품을 생산·판매하여 농가 소득을 증대하고 일자리를 창출하기 위하여 설립되었다. 2005년 지역의 농업 특산품을 2차 가공 식품으로 제조하기 위하여 연구 개발을 시작하였다. 2006년 6월 사과를 원료로 비타민을 생산하는 공법을 자체 개발하여 ‘충주사과비타민’이란 브랜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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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충주 지역에서 만들어진 건물이나 구조물. 건축 문화는 시대 조건의 반영으로 그 시대에 지역적 특성을 지닌 건축적 총체를 의미한다. 충주의 건축 문화는 고대부터 현대까지 한반도의 중원이라는 지역적인 특성을 지닌 건축적인 총체라고 할 수 있다. 충주 지역이 중원의 중심이라고 한다면 중원 지역은 제천·단양·청주·보은·진천·원주·영월·여주·안성·영주에 이르는 넓은 공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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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충주시 신니면에 속하는 법정리. 1914년 4월 1일에 행정구역 통폐합 때 불견리(不見里)와 학성리(鶴城里)의 이름을 따서 견학리(見鶴里)라 하였다. 견학리는 일찍이 충주와 서울을 오가는 길가의 양옆 너른 들에 형성된 마을로, 본래 충주군 신석면(薪石面)에 속하였다. 1914년 4월 1일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불견리·학성리·마제동(馬蹄洞)과 주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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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충주시 신니면 견학리와 주덕읍 창전리에 있는 선사시대에서 고려시대에 이르는 유물산포지. 견학리 유물산포지는 충주에서 서울로 향하는 국도 3호선을 따라 주덕읍에서 신니면 면소재지쪽으로 약 2㎞ 가면 왼쪽으로 견학리 토성 못미처 북향한 낮은 구릉지대에 위치한다. 이곳은 가섭산 동사면에 해당된다. 유물산포지는 낮은 구릉지로 견학리성 밑 마을에서 창전리 새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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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충주 지역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재화·용역의 생산·분배·소비와 관련되는 활동 전반과 영역. 충주시는 월악산과 충주호 등 수려한 자연 환경과 관광 자원 그리고 중앙탑과 충주 고구려비 등의 풍부한 문화 유산 등 개발 자원이 풍부하여 성장 잠재력이 높은 지역이다. 그러나 이러한 지리적 특성으로 인해 358,124㎢의 국립 공원, 18.1㎢의 수변 구역,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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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주사고는 1390년(공양왕 2)부터 임진왜란이 일어나는 1592년까지 약 200년 동안 고려의 중요 전적과 조선 전기의 역대 실록 그리고 중요한 서책과 문서를 보관하던 창고의 하나였다. 그러나 1592년 4월 28일 충주 탄금대 전투에서 신립이 패하여 충주시가지가 불탈 때 시가지 내에 있던 충주사고와 그에 보관된 서책들도 사라졌다. 우리나라는 일찍부터 역사를 기록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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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0년에 세워졌던 담배 수납장이 특이하게 생겨 많은 사람들이 문화재적 가치가 있다고 평가하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는데, 윤우식 씨와의 인터뷰 과정에서 6·25전쟁 때 불타버렸고 미군들이 자기들의 잘못을 시인하고 1950년대(혹은 1960년대) 말에 재건축해주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조금은 실망스러웠다. 그러나 그 인터뷰 과정에서 영단 방앗간의 창고 건물의 상량문이 남아 있어서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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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충주 지역의 풍광(風光)·풍속(風俗)·사적(史蹟) 등을 유람하는 일. 전국 5대 관광권의 하나인 충청관광권역에 속하는 충주호권은 행정구역상 충청북도의 충주시, 제천시, 단양군, 음성군, 진천군, 괴산군 등에 해당되는 지역인데 해안을 끼지 않는 내륙 지역으로서 산악, 수변, 온천 등의 자연 자원과 역사·문화 자원이 많이 분포되어 있다. 또한 충주호 관광권의 월악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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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8년 5월 25일 충청북도 충주시에 있던 관찰부를 청주시로 이전한 일. 일제는 통감부 설치 이후 보호국 체제의 완결이라 할 지방제도 개정을 통해 식민 통치의 항구적 기반을 세우고자 하였다. 일제가 추진한 지방제도 개정의 골자는 갑오개혁 시기에 마련된 정부-도-군으로 이어지는 지방제도의 기본 골격을 유지하면서도, 군의 기능을 약화시키고 면의 기능을 대폭 강화하여 촌락 사회에 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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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충주시에 있는 주요 도로와 교통 수단 및 관련 시설. 통합 충주시에는 고속국도 2개 노선, 일반국도 4개 노선, 국가지원지방도 2개 노선, 지방도 9개 노선, 군도 27개 노선 등이 있다. 또한 관내에는 충북선의 주덕역, 달천역, 동량역, 삼탄역, 충주역, 목행역 등의 6개 역이 있다. 1. 광역 도로 교통망 경기도 여주-경상북도 구미 간의 중부내륙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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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충주시에 있는 기독교인들의 신앙 공동체. 충주의 교회 역시 다른 중소 도시와 마찬가지로 다양한 교파가 모두 유입되어 있다. 감리교·장로교·침례교·순복음교회·성공회·그리스도의교회·구세군·성결교회 등이 그러하다. 서울과 영남·호남을 잇는 중요 길목에 있는 충주의 지리적 위치는 사람들이 왕래하는 과정에서 빼놓을 수 없는 선교지였다. 충청북도 최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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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충주시 신니면 광월리에서 수안보면 화천리까지 연결되는 국도. 국도 3호선은 남해에서 초산으로 연결되는 국도로 충주시 남부를 동서로 횡단한다. 일명 3번 국도, 남해~초산길이라고도 한다. 충주시 구간의 시점은 신니면 광월리이며, 종점은 수안보면 화천리이다. 고속도로가 건설되기 전 충주와 서울을 잇는 가장 중요한 도로였다. 국도 3호선은 일제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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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충주시 대소원면 금곡리 아랫쇠실에 있는 고려시대 야철지 유적. 충주는 우리나라 3대 철산지의 하나다. 특히, 대소원면은 지금까지 모두 43곳의 야철지가 확인된 곳이며, 고려시대의 다인철소가 위치했던 곳이다. 금곡리는 대소원면의 중심에 위치하며, 쇠와 관련된 지명이나 마을명에서 그 비중이 확인된다. 금곡리에서 야철지는 아랫쇠실과 조랫말 두 곳에서 확인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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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7월부터 1여 년간 충주시가 기업 도시와 혁신 도시로 선정될 수 있도록 펼친 시민 운동. 노무현 참여정부의 핵심 정책 중 하나는 수도권의 과밀화에 따른 제반 문제 해결과 지역의 균형 발전을 통한 새로운 국가발전의 성장 동력을 형성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기업의 지방 분산 육성과 국가 기관의 지역 분산이라는 관점에서 기업 도시와 혁신 도시라는 두 가지 어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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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충청북도 충주시 살미면 내사리에 조성된 사업가 김금산의 묘. 충주시 살미면 내사리 88-1번지 금산농원의 능선에 위치한 묘로, 금산건설과 현대주택의 회장을 역임한 김금산의 묘이다. 김금산은 김해김씨 후인으로 1919년 빈한한 가정에서 태어났으나, 일찍이 사업에 매진하여 큰 기업을 일구어낸 인물이다. 1985년 가락종친회 경인지구 종친회장(駕洛宗親會京仁地區宗親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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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충주 지역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이자 정치인. 김기철은 1917년 서울에서 태어났으며, 일본 관서대학 전문학부 법과를 중퇴하였다. 1938년 만주 길림사범학교를 졸업하고 교편을 잡다가 만주 신선우급교 교장이 되었다. 그 후 상하이 임시정부에 가담하여 독립운동을 하다 귀국하여 1948년 충주에서 대동청년단 소속으로 제헌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1954년 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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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충주 지역의 효부. 김성배 처 전주이씨는 군수 이삼응의 4녀로 태어나서 14세에 김성배와 혼인하였다. 시부모님을 모시고 9년 동안 딸 셋을 낳아 기르다가 남편이 3년간 병석에 있을 때 정성껏 간호했고, 남편이 죽자 같이 죽으려 했으나 사람들의 만류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시어머니가 중풍으로 5년간 병석에 계실 때 지극 정성으로 보살펴서 마을에서 칭송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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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충주 지역에서 활동한 교육자. 김재옥은 1931년 충청북도 음성군 감곡면 상평리에서 출생하였다. 음성여자중학교를 거쳐 1949년 충주사범학교를 졸업한 뒤 1950년 6월에 충주 동락초등학교 교사로 부임하여 재직 중 한국전쟁을 맞았다. 당시 북한군은 서울을 점령하고 계속 진격하여 7월 5일 음성군 무극리까지 점령하고 충주 방면으로 진출하고 있었다.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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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2년(헌덕왕 14) 3월 웅천주 도독 김헌창이 일으킨 반란 사건. 『삼국사기』에는 “822년 3월에 웅천주 도독 헌창(憲昌)이 그의 아버지 주원(周元)이 왕이 되지 못한 것을 이유로 반란을 일으켰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825년에는 김헌창의 아들 김범문(金梵文)이 고달산(高達山)의 산적 수신(壽神)과 함께 다시 반란을 일으켰으나 곧 진압되었다. 김헌창이 반란을 일으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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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의 본류로 강원도 삼척시 대덕산에서 발원하여 충청북도 충주시와 경기도 남부를 흘러 경기도 양평군 양수리에서 북한강과 합류하여 서해로 흘러드는 강. 본래 명칭은 한강이나 경기도 양평군 양수리에서 북한강과 합류하므로 편의상 남한강이라고 부른다. 남한강은 강원도 삼척시 대덕산(大德山)[1,307m]에서 발원하여 골지천, 동강을 따라 남서쪽으로 흐른 뒤 영월읍에서 평창강(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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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요는 농사를 짓는 사람들에 의해 불렸고 전승되어 온 구전문학이자 음악이다. 이들 농요는 내용적으로 농사의 어려움, 삶의 애환, 역사적인 이야기 등을 담고 있다. 형식적으로는 일의 동작을 맞추고 노동의 어려움을 잊기 위해 주고받는 식으로 진행된다. 그리고 농요는 입으로 불려 전해지므로 시대에 따라, 지역에 따라 조금씩 다른 모습으로 나타난다. 마수리 농요는 남한강 유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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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 팔당댐 공사가 시작되면서 서울에서 올라오던 황포돛대를 세운 상선들과 영월, 단양 등지에서 서울로 향하던 뗏목들이 목계나루에서 점차 자취를 감추게 되면서 목계의 상경기는 침체의 늪에 빠지기 시작하였다. 그래도 목계나루에는 남한강을 건너 서울로 가는 손님들과 화물을 실어 나르는 나룻배와 찻배가 있어서 목계의 중요한 수입원 구실을 하였다. 이러한 목계마을이 회복 불능의 상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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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주는 남한강의 중류에 위치하여 삼국시대부터 수로 운송을 이용한 교통의 요지로 중시되어 온 지방이다. 고려시대에는 전국의 세곡을 저장하는 12조창을 설치하였는데 충주에 설치한 조창이 덕흥창이었다. 고려 후기와 조선 전기에는 덕흥창 이외에 경원창이 설치되어 경상도의 세곡을 받아 경창으로 수송하였다. 1465년(세조 11)에는 금천(현 충주시 중앙탑면 창동리)에 있던 덕흥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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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충주시 성내동 충주문화회관 안에 있는 수석 전시 시설. 충청북도 충주 지역은 예부터 남한강과 달천강을 젖줄 삼아 우리나라의 수석 문화를 꽃피워 온 수석의 본고장이다. 이에 충주시에서 전국 각지의 수석 애호가들이 기증한 수석들을 모아 산수의 온갖 풍경과 기묘한 아름다움이 조화롭게 응축된 자태를 뽐낼 수 있도록 전시하며, 우리나라 수석문화를 한눈에 볼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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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충주시와 제천시·서울특별시 등에서 1987년부터 매년 10~11월에 개최되는 미술 작품 전시회. 남한강전은 충청북도 충주 지역을 중심으로 한 남한강 유역의 제천, 단양, 음성, 괴산, 장호원 등에서 활동하는 미술 작가들의 그룹 전시회로, 충주와 제천·서울 등지에서 매년 순회 전시회를 열고 있다. 1986년 가을 조한상, 이인봉, 이성주, 신범승 등 충주 지역 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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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기서(초대 마수리 농요보존회장) 씨는 1972년 전국 민속예술경연대회 대통령상 수상의 순간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마수리 농요가 1969년 방송을 탔다면, 1971년부터 1972년까지는 마수리 농요가 공개석상에서 인정을 받는 일이 벌어졌다. 박기서 씨의 기록에 따르면 1971년부터 충북도에서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고 1972년 10월에 제13회 전국 민속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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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노작요가 생긴 것은 1973년이다. 그해 10월 전국 민속예술 경연대회가 청주에서 열렸는데, 전년도 대통령상 수상팀이 식전 행사로 공연을 하도록 되어있었다. 그러나 문제는 팀의 구성이었다. 1972년에는 마수리 농요팀을 중심으로 국악협회팀과 영동여고팀이 하나의 단체를 이루었기 때문이다. 이번에도 그렇게 할 수 없다고 생각한 지남기 선생은 마을의 여자들을 중심으로 여성 노작요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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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충주시 앙성면에 속하는 법정리. 행정구역 개편 전의 이름인 능동(陵洞)과 죽암리(竹岩里)에서 ‘능(陵)’자와 ‘암(岩)’자를 따 ‘능암(陵岩)’이 되었다. 본래 충주군 복성면(福城面)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능동과 죽암리의 일부가 통합되어 능암리로 개편되었다. 1956년 7월 8일 충주읍이 충주시로 승격됨에 따라 중원군에 속하게 되었고,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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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9년 간행된 충청북도 충주 지역에서 성장기를 보낸 시인 이상화의 첫번째 시집. 이상화(李相和)는 충청북도 음성에서 태어나 성장기를 충주에서 보내고, 줄곧 서울에서 생활하고 시작(詩作) 활동을 하다가 충주에 묻힌 시인이다. 1970년대에 가장 왕성하게 활동한 이상화 시인은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나기까지 『늪의 우화』, 『여름산』, 『석인상(石人像)』 등 3권의 시집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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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충주시 주덕읍 삼청리에 있는 단군을 모시고 제향을 올리는 사당. 단군전은 단군의 영정이나 위패 등을 모시고 봉향하는 사당을 말한다. 단군성전이라고도 한다. 단군왕검은 천제 환인의 외손이자 환웅의 아들로 우리 역사상 최초로 조선을 개국한 시조라 전한다. 단군에 대한 숭배와 봉향은 왕조 국가 및 민간에 의해 이루어졌는데, 특히 민족의 정체성이 강조되던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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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충주시 단월동과 용두동을 연결하는 달천 위에 있는 다리. 1914년 행정구역 개편시 송림리·이부동·달신리·단신리의 각 일부가 병합되어 달천리가 되면서 달천교가 되었다. 길이는 상행선은 276.0m·하행선은 276.2m, 폭은 10.5m, 유효 폭은 8m(상)·8.5m(하), 높이는 10m(상)·11.3m(하)이다. 경간 수는 상행선·하행선이 9개이고, 최대 경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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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3월 충청북도 충주 지역에서 일어난 독립만세 운동. 일제의 식민지 조선에 대한 폭압적 무단통치에 저항하여, 1919년 3월 1일 민족 대표 33인이 태화관에서 독립 선언서를 낭독하고, 탑골 공원에서는 군중들이 독립 만세를 외치며 시위 대열을 이루었으며, 시위의 맹렬한 불길은 삽시간에 전국 방방곡곡으로 번져 나갔다. 당시 충주 일원에서도 거족적인 민족 독립 운동 소식을 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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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에 공납제(貢納制)를 폐지하고 대신해서 제정·실시한 재정제도. 대동법은 조선 전기 조세제도 중 호역(戶役)으로 부담하였던 세납(稅納)을 토지세로 전환하는 제도이다. 즉 조선 전기 지방의 특산물을 현물로 납부하는 형태로 운영되던 공납제는 방납(防納)의 성행, 지주제의 확산, 공납제 부담의 불균형 등으로 인해 큰 폐단을 야기하자 이를 바로잡기 위해 시행되었다. 이에 따라 중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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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충주시 용두동에 있는 축산물 도축 및 육가공, 유통 전문 기업. 양질의 육류 공급을 통한 국내 육가공, 유통 산업 발전에 기여하고자 1981년 설립되었다. 대성그룹의 모기업인 대성실업은 1981년에 대성산업으로 창업하였다. 대성산업은 개인사업장으로서 충주 지역의 축산물 도축장으로 출발하여 현재의 대성실업 도축 부문으로 계승되고 있다. 10여 년간 축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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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55년(고종 42) 충청북도 충주시 수안보면 미륵리 하늘재에서 충주 정예병이 몽고군을 크게 격파한 전투. 대원령은 삼국시대는 계립령·마골재, 고려시대는 대원령, 지금은 하늘재라 불리는 고개이다. 지금의 충주시 남쪽에 있는 고개로 충청북도와 경상북도의 경계를 이루는 지리적인 요충지이다. 이 때문에 대원령 일대는 충주 및 월악산과 연결되어 몽고군과의 중요한 격전지가 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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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충주시 충의동에 있는 대한법률구조공단 청주지부 소속 출장소. 대한법률구조공단은 여러 사정으로 인해 법의 보호를 제대로 받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법률 상담, 변호사에 의한 소송 대리, 기타 법률 사무에 관한 각종 지원 등을 통하여 피해 발생을 예방하거나 침해당한 권리를 구제해주는 공공 기관이다. 1972년 7월 1일 법무부 산하 재단법인 대한법률구조협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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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충주 지역에서 계획하는 일이나 집안이 잘 되기를 바라며 제사상을 차려 놓고 부르는 의식요. 「덕담가」는 탁발승이나 직업적인 걸립패(乞粒牌)들이 걸립 때 고사상을 차려 놓고 부르는 노래의 총칭으로 일명 「고사덕담」, 「고사소리」라고도 한다. 무가에서 파생된 곡으로 중간 중간에 후렴이 붙어 있는 선후창이다. 1980년 한국정신문화연구원(현 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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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충청북도 충주 출신이거나 충주 지역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조선이 일본제국주의의 식민지가 된 후 일찍이 중부권 문화의 선진 지역이었고 의병항쟁의 고향이었던 충주에서는 다양한 갈래의 항일운동이 그치지 않았다. 당시의 항일운동은 결국 국권을 회복하고 민족의 자주성을 되찾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일제의 무단통치기에 엄정섭(嚴正燮)은 충주 출신으로 광복단에 가입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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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충주시 앙성면에 속하는 법정리. 행정구역 개편 전의 이름인 돈담리(敦潭里)와 산정리(山亭里)에서 ‘돈(敦)’자와 ‘산(山)’자를 따 ‘돈산(敦山)’이 되었다. 본래 충주군 복성면(福城面)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사이동(沙伊洞)·돈담리·산정리·연동리(蓮洞里)의 각 일부가 통합되어 돈산리로 개편되었다. 1956년 7월 8일 충주읍이 충주시로 승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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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4년(고종 31) 4월 초부터 약 6개월 동안 충청북도 충주 지역에서 전개된 항일 농민운동. 동학농민운동은 1894년 전라도 고부의 동학 접주(接主) 전봉준 등을 지도자로 동학교도와 농민들이 합세하여 교조의 신원과 외세를 물리칠 목적으로 일으킨 농민운동이다. 충청북도 지역은 동학농민운동의 전개 과정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무엇보다 충청북도는 189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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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토박이이며 한때는 노인을 위한 봉사단체인 은십자 운동본부의 사무국장과 본부장을 역임하셨다는 정무후 씨. 자신이 노인이 된다는 생각은 전혀 해보지도 않았는데 어느덧 자기가 노인네라며 껄껄 웃으시는 모습이 세련되면서도 중후한 멋을 풍긴다. 그의 고향은 두 군데라고 한다. 한 곳은 서울이고, 또 하나는 여기 미륵리라고 망설임없이 말한다. 20여 년 전만 하더라도 서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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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충주시 주덕읍 신중리에서 망청개과 관련하여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 충주시 주덕읍 소재지에서 서울로 향하는 도로를 따라 500m 떨어진 도로변에 위치한 신중리 신촌을 흔히 ‘망청개’라고 한다. 청일전쟁 때 일본군과 청나라군이 이곳에서 싸워 청군이 일본군에게 패한 곳으로, 청나라가 망했다는 의미에서 신촌을 망청개라고 부르게 되었다는 지명유래담이다. 1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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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충주시 이류면 매현리에 있는 터널. 2004년 12월 15일 중부내륙고속도로 충주-북상주 구간이 완공되어 개통된 터널이다. 충주 IC에서 괴산 IC까지 이어지는 구간에 있는 7개 터널 가운데 있는 터널이다. 충주 IC에서 괴산 IC까지 이어지는 7개 터널은 만정터널, 장고개터널, 두정터널, 탄용터널, 매현 1터널, 매현 2터널, 조곡터널이다. 터널이 지나는 곳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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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충주시 노은면 가신3리에 있는 조선 말기 명성황후 피난지. 1882년(고종 19) 6월 9일 임오군란(壬午軍亂)이 일어나자 신변의 위협을 느낀 명성황후는 서울을 탈출하여 고향인 여주의 민위영 집에 숨었다가, 장호원에 있는 민응식의 향제를 거쳐 충주목사 민응식의 집을 찾아가던 중 자취를 감추기 위해 충주시 노은면 가신리 국망산 밑 신흥동 이시영의 집으로 피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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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충주시 용탄동 충주제1산업단지에 있는 페로 데크 생산공장. 명화엔지니어링은 설립 이후 페로 데크(Ferro Deck) 사업계획 추진을 계속 진행하여 현재 건설업계에서 기술력과 전문성을 인정받고 있다. 충주공장은 국내 최초로 시스템 데크(System Deck)를 생산하는 등 신기술과 품질관리를 최우선으로 하여 지속적인 성장을 하고 있다. 건축 슬래브(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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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충주시 신니면에 속하는 법정리.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시 모도원동(毛陶院洞)·남악리(南岳里)·수월리(水越里)의 일부를 병합하고 모도원동과 남악리의 이름을 따서 모남리(毛南里)라 하였다. 모남리는 수레의산[679.4m] 줄기 아래에 남쪽으로 형성된 마을로 일찍이 충주의 관문 구실을 하였다. 그에 따라 목고개(못고개)를 넘어오는 사람들의 쉬어 갈 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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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부터 일제강점기까지 충청북도 충주시 엄정면 목계리의 옛 이름. 목계는 특별한 목적을 가지고 인위적으로 형성된 촌락이 아니고, 목계가 가지는 자연 지리적 이점에 의하여 조선 후기인 1750년 이전에 이미 내륙의 상항(商港)으로 강을 내려오는 어염선이 정박하며 세를 내는 곳이 되었다. 한강의 가항구간 중 중간에 위치하여 육지와 바다의 물산이 집산될 수 있는 지점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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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충주시 엄정면 목계리에서 옛날 뱃길이 무사하고 내륙의 장사가 잘 되기를 비는 민속 의례. 목계 지역은 충북선 철도가 가설된 1930년대 이전까지 남한강 수운의 중심지였다. 목계 지역이 남한강 수운의 중심지로 부상하여 성황을 누릴 수 있었던 직접적인 원인은 가흥창(嘉興倉)의 설치와 존속에 있다. 가흥창은 1465년(세조 11)에 설치되어 개항 전까지 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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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계교(牧溪橋)를 건너 목계마을로 접어들면, 왼쪽 산 바위 밑에 목계가 어떤 마을인지를 금방 알 수 있게 하는 비석군(碑石群)이 있다. 샛강에 다리를 놓아 제하공덕(濟河功德)을 칭송한 ‘밀양박공해성송덕비(密陽朴公海成頌德碑)’, 개인 재산을 털어 목계국민학교를 설립한 공을 기려 마을 사람들이 세운 ‘파평윤공해영송덕비(坡平尹公海英頌德碑)’를 비롯하여 목계마을의 유래와 목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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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대에 철도와 도로망이 개설된 후 수운을 기반으로 성장해 가던 남한강 주변의 많은 포구들이 쇠퇴의 길을 걷게 되지만, 목계는 나름대로 새로운 변신을 하며 시대적 변화에 적응해 나갔다. 6·25전쟁 이후까지도 수운의 기능을 유지하였다. 1960년대 초 팔당댐 공사로 수로가 막히기 전까지는 돛단배가 오르내렸고 강원도 정선 등에서 생산된 목재를 서울로 운반하는 뗏목은 수시로 내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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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충청북도 엄정면 목계리에 있었던 금융기관. 목계(牧溪)는 남한강 상류에 위치하여 육로가 발달하기 전에는 서울과 중원 지방을 잇는 한강 수로의 내륙항으로서 교역이 활발하여 큰 시장이 형성된 지역이었다. 목계금융조합은 충청북도 엄정면 목계와 인근 지역 농민들에 대한 금융 지원 업무와 지방 청년들을 농촌 진흥에 동원하기 위해 설립되었다 목계금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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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계의 뱃고사는 일년 내내 무사 운항을 비는데 목적을 두었다. 예전에는 제일(祭日)을 정월 특정일로 고정하였고 제장(祭場)을 나루터(선착장)로 삼았으며 선주나 뱃사람이 직접 제관이 되어 행례를 거행하였다. 그러나 1925~1930년 사이에 중부 내륙지역을 관통하는 도로가 개통되었고, 충주-조치원간 충북선 열차가 개통되면서 목계나루의 활기가 점차 시들해졌다. 또한 1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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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충주 지역에서 무당을 중심으로 하여 전승되는 종교. 충주 지역의 무속 신앙은 무속 신으로 추앙받고 있는 임경업 장군 및 최영 장군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또한 엄정면 목계리의 목계 별신굿은 충주를 대표하는 무속 신앙의 하나로 현재까지 전승되고 있으며, 양반 고을 충주답게 앉은굿이 성행하고 있다. 현재 충주 임충민공 충렬사에 배향되고 있는 임경업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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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충주시에서 활동하는 문학인과 문학단체. 충주 문학의 역사는 길다. 신라의 외교 문서를 명문으로 썼다는 문장가 강수(强首)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충주에서 문학의 꽃을 피운 사람들을 모두 헤아릴 수는 없다. 여기서는 1910년 이후 충주 출신 또는 충주 인근의 출생으로 활동한 문인으로 한정하기로 한다. 1. 유재형(柳在衡) 호는 유촌(柳村)이다. 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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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충주시에 속하는 법정동. 충주역이 있어 역전동이라 불렀으나 충주역이 봉방동으로 이전하여 동 이름과 실제가 일치하지 않음으로 ‘선진 문화 시민의 자긍심을 높이자’는 뜻에서 문화동(文化洞)으로 개칭하였다. 문화동은 원래 충주성(忠州城) 서문 밖 충주천 건너에 있던 작은 마을로 서북쪽으로 충주 탄금대로 가는 길과 서쪽으로 서울과 청주로 가는 삼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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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충주 지역의 민간에서 전승되고 있는 습속(習俗). 민속은 민중들의 삶속에 일상적·집단적·유형적으로 되풀이되어 누적된 지식·기술·행위 등의 총체적인 문화 현상이라고 일컬어지고 있다. 따라서 민속은 공간적·역사적·시간적 조건에 의해 형상화된 민간의 생활 양식이라고 할 수 있다. 충주 지역 민속의 배경은 다양한 측면에서 찾을 수 있다. 먼저 역사적으로 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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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시대부터 시작된 택견은 신라시대에는 화랑도로서 삼국을 통일하는 근간이 되었고, 고려시대에는 호국 무예로서 무과 시제의 정규 과목이 될 정도로 국가 차원에서 장려했던 무예였다. 그러나 조선시대에 이르러 숭문천무(崇文賤武) 사상으로 인해 쇠퇴하기에 이르렀으며, 한일합방 후에는 일제의 민족 문화 말살 정책으로 택견꾼들은 일제의 눈을 피해 산에서 수련해 왔다. 그동안 아무도 돌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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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충주 출신의 법조인. 박상완은 1941년 충청북도 충주시 살미면 문강리 문산에서 아버지 박희원과 어머니 성봉선 사이에서 독자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대쪽 같은 성품의 원칙주의자였다. 수회초등학교와 충주중학교를 졸업하고 서울에 있는 경기고등학교에 진학하였다.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을 졸업한 후 동 대학원을 다니는 동안 제1회 사법고시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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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당시 충주 인근에서 벌채한 목재를 동량면 조돈나루에 모아 뗏목을 만들어 남한강 수로를 이용하여 서울로 운반하였다. 이때 뗏목을 만드는 작업을 통해 마을 사람들이 상당한 수입을 올릴 수 있었다고 한다. 목계마을에서 여러 대에 걸쳐 살았고 아들인 권태희 씨의 죽마고우이기도 한 조일상 씨를 통해 권중대 씨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당시 군청에 근무하던 권중대(權重大)[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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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충주시 엄정면 괴동리에 있는 조선 후기 사찰. 백운암은 대한불교 조계종 제5교구 법주사(法住寺)의 말사이다. 『조선환여승람(朝鮮寰輿勝覽)』에는 충주군 북쪽 태봉산에 있다고 하였다. 사원 입구 남쪽에 충주 경종 태실과 태실비가 있다. 백운암의 법당 안에는 충주 백운암 철조여래좌상이 있는데, 충주 단호사 철조여래좌상 및 대원사 충주 철조여래좌상과 함께 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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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6년(고종 3) 충청북도 충주 지역을 포함한 전국에서 일어난 천주교 박해 사건. 1800년대 중반 조선의 주변 정세는 영불 연합군이 북경을 함락하고 러시아가 남하 정책을 펴며 두만강 국경 지대를 수시로 침범할 만큼 혼란스러웠다. 1864년(고종 1) 러시아인들이 함경도 경흥부에 와서 통상하기를 요구하자 미처 대책을 세우지 않고 있던 흥선대원군 이하 정부 요인들은 크게 당황하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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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충주시 앙성면 지당리에 있는 저수지. 충주시 앙성면 지당리에는 1992년 폐교된 복성국민학교가 있어 지당저수지, 또는 복성저수지라 하였다. 노은면의 가신리와 지당리의 경계에 있는 승대산(僧代山)[567m] 동쪽의 둔티고개와 승대산 서쪽의 질마루고개, 질마루재 등의 고개에서 북류하는 계곡수가 지당리 대촌마을을 거쳐 복성저수지로 유입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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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충청북도 충주시에 분포하는 불과 연기를 이용한 통신 수단과 시설. 봉수는 가락국의 수로왕 설화에서 보이듯이 삼국시대부터 실시되었으며, 고려시대 1149년(의종 3) 조진약(曺晋若)의 건의에 의해서 체계적으로 정비되었다. 조선시대 세종대에는 봉수대 시설, 봉군(烽軍)의 신분, 봉화 홰(炬)의 수를 다시 정하고, 봉수의 노선을 구분하여 봉수제도의 근간을 마련하였다. 189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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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충주시 중앙탑면 장천리에 있는 조선 말기에 지어진 사찰. 충주 장미산성의 동쪽 입구에 위치한 절로, 원래 봉루암(鳳樓菴)이라 부르다 현재는 봉학사라 불리고 있다. 『조선환여승람(朝鮮寰輿勝覽)』에는 장미산(薔薇山)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봉학사는 1895년에 비구니 임광제가 봉루암을 창건한 이후 근대에 중창된 산사이다. 1921년에 임광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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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흥산 돌계단은 급경사여서 양쪽에 만들어 놓은 손잡이를 잡고 올라가야 안전하다. 숨을 헐떡이며 올라가 한 숨을 돌리면 목계마을 주민들이 동제를 지내는 부흥당이 앞을 막아선다. 부흥당 문은 항상 자물쇠로 잠겨 있다. 문을 열면 당내에는 세 분의 신상이 모셔져 있다. 중앙 정면에는 서낭신도(城隍神圖)가, 정면에서 보아 서낭각시의 오른쪽에는 산신도(山神圖)가, 왼쪽에는 용왕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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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0년대 중반까지 우리나라의 사과 주산지는 경상북도 대구 근교였으나 지구 온난화 등으로 주산지가 충청도와 경상북도 북부 지방으로 이동하면서 사과 재배의 적지가 바뀌게 되었다. 특히 충주 지역은 남한강 상류여서 퇴적토가 많고 산지는 사질양토로 배수가 잘 되고 유기물 함량이 타 지역에 비하여 우수하여 최적의 사과 재배 여건을 갖추고 있다. 또한 충주시는 지역 특성에 맞는 재배법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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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충주시에 분포되어 있는 주변에 비해 높이 솟은 봉우리. 충주는 동부 태백산지, 북서부 차령산지, 남동부 소백산지로 둘러싸인 분지의 형상을 띤 지역으로 산지의 비중이 높다. 그에 따라 산지가 해체되는 과정에서 솟아 있는 다양한 고도의 산들이 곳곳에 자리 잡고 있다. 규모는 대체로 300~1,000m에 이르는 중·저산성 산지들이며, 충주시 경계부로 갈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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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 10월 ‘새마을 가꾸기 사업’으로 시작된 이른바 새마을 운동은 1970년대 농촌 근대화를 목표로 한 범국민적 운동이었다. 1970년 가을 전국의 모든 농촌마을에 일괄적으로 시멘트를 지원하면서 마을 주민들의 총의에 따라 공동사업에 쓰도록 했던 것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이처럼 정부의 지원을 받아 시작된 새마을 운동은 근면·자조·협동을 기본정신으로 하여 물리적 환경 개선은 물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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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충청북도 충주 출신의 독립운동가. 본관은 대구(大邱). 할아버지는 서회보(徐晦輔)이며, 아버지는 서중순(徐重淳)이다. 서상경은 청주농업학교에 다니던 중에 3·1운동에 가담하여 「이천만 동포에게 고함」이라는 격문을 등사하여 배포하다 체포되어 5개월의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에는 이강하, 이윤희 등의 아나키스트들과 접촉하면서 고향인 충주에서 농민운동을 전개하였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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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충청북도 충주 출신의 독립운동가. 서정기의 본관은 대구(大邱)이고, 아버지는 서병창(徐炳昌)이다. 선린상업학교를 중퇴하고 일본에 유학한 서상경(徐相庚)의 영향을 받아 1925년경부터 인간의 절대 평등과 자유를 주장하며 국가를 타파의 대상으로 삼았던 아나키즘(무정부주의) 운동에 가담했다. 충주에서 서상경 등 3인의 동지와 회합하고, 서울에 올라가 아나키즘 계열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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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이후 충청북도 충주 지역에 전래된 서양의 학문 및 종교. 조선시대 선조 이후 중국을 통해 서양의 과학기술문물과 한역(漢譯)된 서학서가 전래되었다. 이에 대한 학문적 호기심에서 조선 학자들의 연구가 시작되었다. 이 때문에 서학이라는 용어는 협의로는 천주교를 가리키기도 하나, 광의로는 서양에 대한 관심을 갖고 연구하는 경향을 뜻한다. 18세기 이후 서양의 과학기술문명에 대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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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충주군수를 역임한 행정가이자 교육자. 서회보는 1849년 충청북도 충주시 신니면 송암리에서 태어났다. 1907년(순종 1) 12월에 영동군수로 재임하다가 충주군수로 전임하였으며, 1908년 3월 공립충주보통학교 교장을 겸임하게 되었다. 충주군수로 있을 때 많은 시설을 만들고 보수하였으며 지역 주민들을 잘 보살펴 많은 칭송을 받았다. 1911년에 서회보의 공적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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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충주시에서 가톨릭·성공회·정교회 교인들이 모여 예배하는 곳 또는 가톨릭 천주교회. 원래 성당은 신자들이 미사와 같은 종교적 행사에 참여하기 위하여 모이는 장소로, 건물이라는 물리적인 기능뿐만 아니라 신자들을 지체로 한 그리스도의 신비체로서의 성역이라는 정신적 기능을 구체화한 장소라는 의미를 지닌다. 물리적 구체물로서의 성당은 특히 건축학적으로 관심을 받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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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4년 충청북도 충주 지역에서 활약한 동학농민운동 지도자. 성두환(成斗煥)[1845~1895]의 출신에 대해서는 두 가지 설이 있다. 충청도 청풍 송계리에서 농사를 짓던 평민이었다는 설과, 조상 대대로 한의원을 하던 집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었고, 그를 토대로 많은 사람들을 동학으로 끌어들였다는 설이다. 성두환이 동학에 입도한 시기는 정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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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충주시 용산동에 있는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 소속 교회. 세계기독교통일신령협회(통일교회)는 1954년 5월 1일 서울에서 문선명 선생에 의해 창설되었다. 1963년 5월 31일 정부에 사회단체로 등록되었다. 교리서로는 1957년 8월 15일 『원리해설』이 출판되었으며, 1966년 5월 1일 『원리해설』을 보완한 『원리강론』이 나왔다. 종교와 사상, 민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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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재석[1955~ ] 씨는 마수리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어릴 때부터 농악을 들을 수 있었다. 그러나 농악놀이에 직접 참여한 것은 16살 때인 1970년이라 한다. 당시 4-H 경연대회에 농악 부문이 있어서 지남기 선생의 지도로 대원들과 함께 연습을 했다고 한다. 그리고 신니면 화안리에 있던 산수초등학교에서 5월 5일 단오제가 열리곤 했는데 그때도 역시 팀을 구성 농악연습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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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계는 본래 충주군 엄정면 지역으로 산계동(山溪洞) 또는 목계리로 불렀다. 산계동의 산(山)은 ‘뫼’ 혹은 ‘모이’로 불리다가 ‘목’으로 변한 것으로 보이는데, 마을 뒷산인 갈산이 ‘갈매기’로 부르는 것이 이를 뒷받침한다. 현재와 같은 목계리의 지역 구성은 1914년 일제에 의한 행정 구역 통·폐합 정책에 따라 이루어진 것이다. 이를 통해 전통적으로 목계를 구성하던 여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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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충주시 수안보면 온천리에 있는 휴양 시설. 1989년 12월 (주)남주관광개발이 한국에서 유일한 온천 지역 스키장으로 수안보 오로라밸리 스키장 및 유스호스텔을 개장하였다. 1994년 (주)사조마을에서 수안보 오로라밸리 스키장 및 유스호스텔을 인수하여 이름을 사조리조트 수안보지점으로 변경하고 스키장 운영과 유스호스텔을 이용한 청소년 수련 업무를 주로 담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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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충주시 성내동 관아공원에 있는 비. 천주교가 전래된 후 조선에서는 이후 크고 작은 박해가 끊이지 않고 일어났으며, 그때마다 순교자나 희생자가 속출하였다. 박해의 원인과 배경은 정치, 사회, 문화 등 여러 측면에서 보아야 하기 때문에 한마디로 단정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가장 큰 원인은 사회 문화적 요인으로, 당시 조선은 유교를 문화적 지주로 삼고 있었기에 자연스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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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성(慧成)[동가섭사 주지, 본명 玄炳錫] 스님을 만나는 일은 동가섭사를 두 번째 방문했을 때 가능했다. 지난 1월 절 마당에 눈이 남아있을 때 방문했지만 인연이 닿지 않았던 모양이다. 3월에 다시 절을 찾아 가니 며느리인 여현숙 씨가 나와 맞이한다. 여현숙 씨가 절 살림을 맡아 한다는 사실을 들어 알고 있지만 스님과의 인터뷰가 먼저라 스님을 만났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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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렵게 뵈었다. 미륵세계사 주지스님 방안에서 차 한잔의 향기 속에 서로 마주 앉았을 때, 너무 젊어서 놀랐다. 하심(下心)으로 자꾸 스님 자신을 낮추어 ‘얼굴을 내밀 존재’가 아니라는 이유로 동영상은 물론 사진도 찍을 수 없었다. ‘기왕에 여기까지 어렵게 왔으니 차나 한잔 하고 가시라’ 하였다. 그래도 무언가 흔적은 남겨야겠기에 MP3를 녹음 상태로 해서 슬그머니 앞에 놓았더니 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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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중 충주는 가장 희생이 많았던 싸움터였다. 임진왜란 초기에 신립 장군은 탄금대 앞에서 달천과 남한강을 뒤로 하여 배수진을 치고 왜군과 전투를 벌였다. 이 전투는 8,000여 명의 조선군 중 두서너 명만이 살아남았다고 할 만큼 희생이 큰 전투였다. 또한 충주읍성에 있던 많은 사람들, 즉 사민(士民)과 관속(官屬)들이 당대의 명장인 신립의 군대가 주둔하고 있음을 믿고 피난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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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충주시 수안보면 사문리와 괴산군 연풍면 원풍리에 걸쳐 있는 산. 수안보온천에서 동남쪽으로 5㎞ 지점에 우뚝 솟아 있으며, 기암절벽과 암괴들이 수려한 경관을 이루는 산이다. 미륵리의 포암산[961.7m], 북쪽의 월악산[1094m]과 함께 백악기에 암석을 뚫고 들어간 흑운모화강암 지대로, 석산(石山)으로 발달하는 전형적인 화강암 산지 경관을 보인다. 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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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충주시 앙성면에 있는 제약업체. 국민 건강과 나아가 인류 건강에 기여한다는 사명감과 긍지를 가지고 최고의 의약품을 국내외에 공급하기 위하여 설립되었다. 1971년 11월 보생제약사를 인수하여 개인 사업체로 영업을 시작하였다. 1977년 생산 및 매출 증대 등으로 회사 규모가 확대되면서 1977년 12월 신일제약공업주식회사로 법인 전환하였다. 1995년 8월 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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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충주시 주덕읍에 속하는 법정리. 충주군 주류등면에 속하였던 망청리, 신대리, 창전3리, 창전7리의 동네 일부를 분할하여 합쳐 만든 마을로 새로 생긴 마을이라 하여 신중리라 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충주군 주류등면에 속한 망청리, 신대리, 창전3리, 창전7리의 각 일부를 병합하여 신중리라 하고 주덕면에 편입되었다. 1960년에 정식 행정구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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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충주시 주덕읍 신중리 원신중마을에 있는 삼국시대 고분군. 충주는 고대에 삼국이 모두 지배한 고장이다. 백제는 충주를 처음으로 지배했으며, 근초고왕과 근구수왕 때 최대 판도를 이루었다. 고구려는 이미 400년 광개토왕이 신라 내물왕을 원조할 때 충주에 들어와 실제로 군대를 주둔시켜 지배했다는 설과 장수왕의 남하정책에 따라 백제가 웅진으로 천도할 때 충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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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충청북도 충주 지역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이자 교육자. 신태학의 본관은 평산(平山)으로, 경상북도 상주에서 태어나 의당 박세화에게 배웠다. 1908년(융희2) 43세로 충청북도 충주시 노은면 대덕리로 옮겨와 1910년 한일합방이 되자 주권 회복을 위해서는 인재의 양성이 필요하다고 결심하여 평생 후학을 기르는 데 힘을 기울여 왔다. 당시 일본인들이 부산과 서울 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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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충주시 종민동에 있는 조선시대 봉수대. 심항산 봉수는 충주호변에 위치한 심항산 정상부에 축조된 봉수로 『세종실록(世宗實錄)』에 따르면 동쪽으로 청풍의 오현(吾峴)과 응하고 서쪽으로 마산과 통하였다. 봉수대에는 별장 1명, 감관 5명, 봉군 100명 등 마산봉수와 같은 규모의 봉군이 속해 있었다. 심항산 봉수가 있는 심항산은 오성산, 계족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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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충주시 수안보면 안보리 음지말에 있는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의 역터. 안부역(安富驛)은 『고려사(高麗史)』 참역(站驛)조에 처음 기록이 나오며, 조선시대에는 연원도(連原道)에 속한 14개 역 중 하나였다. 안부역에는 대마 3필, 기마 6필, 복마 6필, 노(奴) 106명, 비(婢) 28명, 역리(驛吏) 25명이 속해 있었다. 안부역은 고려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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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충주시에서 이루어지는 언론 활동과 출판 활동의 총칭. 언론은 충주 지역의 정치·사회·문화·교육·사회 전반에 걸친 정보의 소통을 위한 수단으로 말이나 글로써 신문이나 방송을 통해 정보 전달, 문제 제기, 여론을 형성을 하는 활동을 통틀어 말하고, 출판은 책·잡지·소책자를 인쇄하여 필요한 사람에게 판매하거나 배포하는 일련의 행위나 사업을 통틀어 말한다. 1. 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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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남[1957~] 씨는 현재 남편 박경석 씨와 함께 논농사도 짓고 젖소도 키운다. 젊은 시절에는 논농사를 80마지기씩이나 지었다고 하니 대단한 여성이다. 요즘도 젖소를 키우느라 아침과 저녁에는 시간을 내기가 어렵다고 한다. 그래도 저녁 6시에 시간을 내서 1시간가량 마을회관에서 인터뷰를 할 수 있었다. 이 자리에는 이종순[1931~ ] 씨가 함께 하면서 마수리 농요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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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충청북도 충주 지역에 설치된 교통·통신제도. 역은 공문서의 전달, 관리의 왕래와 숙박, 관물의 수송을 돕기 위해 중요 교통로에 설치하였다. 삼국시대 이래로 설치하여 고려 성종 대에 이르러 전국 525개소의 역을 22개의 역도(驛道)로 편성하여 역참을 조직했으며, 역의 중요도에 따라 역정호(驛丁戶)의 수와 공문서 전달 방식을 정하였다. 각 역에는 역마(驛馬)·역장(驛長)·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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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충주시에서 활동했던 연극 단체. 충주 지역에 거주하던 연극 동호인들이 만든 극단으로 지역의 연극 활성화와 프로 극단의 정착을 위하여 창단되었다. 1981년 9월 1일 김준혁이 중심이 되어 창단하였다. 1985년 김준혁이 교통사고로 사망한 뒤 해체되었다. 1981년 9월 창립 기념 공연으로 충주상공회의소에서 「결혼」(이강백 작, 김준혁 연출), 「미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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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부터 할머니 무릎을 베고 누워 자장가삼아 듣던 평강공주와 바보 온달 이야기, 그 이야기의 한 축이 수안보면 미륵리 미륵사지 한켠에 자리하고 있다. 고구려 평원왕의 사위로 북주(北周)[삼국사기에는 後周라 하였다]의 무제가 침입 시에 선봉장으로 활약한 온달은 큰 승리를 거두었다. 그 여세를 몰아 계립령과 죽령 서쪽의 옛 고구려 영토를 회복하겠다는 결의를 하고 남하하였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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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충주 지역의 남한강에서 잡은 올뱅이로 끓인 향토 음식. 올갱이해장국이라고도 하는 올뱅이해장국은 남한강 맑은 물에서 서식하는 올뱅이로 끓여 구수하고 담백한 맛을 낸다. 올뱅이는 비타민·칼슘·헤모글로빈·철분이 다량 함유되어 있는 무지방 고단백 식품으로 임산부·노약자·어린이에게 좋은 식품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성인병 예방, 간기능 보호, 빈혈 예방, 시력 회복, 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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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충주시 수안보면·엄정면·산척면 천등산 일대에서 옥수수로 만드는 국수의 일종. 면발이 길지 않고 똑똑 끊어진 모양이 올챙이처럼 생겼다 하여 올챙이국수라는 이름이 붙었다. 충주의 수안보면과 엄정면, 산척면 등 산간 지역에서는 1940~1950년대 식량이 부족하여 화전을 일구어 농사짓기 좋은 옥수수·콩 같은 밭작물을 재배하였고, 자연스럽게 옥수수로 만든 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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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충청북도 충주시를 배경으로 제작되었던 영화. 나이트클럽 밴드의 고단한 현실을 사실적으로 그려낸 「와이키키 브라더스」는 임순례 감독의 두 번째 장편영화다. 주변부의 이야기를 날카롭지만 따뜻한 시선으로 포착해 낸 이 작품은 충주시 내와 수안보 일대에서 촬영됐다. 충주시청과 충주 시민들의 적극적인 협조로 이루어진 「와이키키 브라더스」에는 대원고등학교와 충주북여자중학교 학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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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충주시 신니면 용원리에 있는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의 역터. 용안역에는 별장 1명, 노(奴) 103명, 비(婢) 81명, 대마 2필, 기마 7필, 복마 7필이 있었다. 용안역은 원래 고려시대 광주도(廣州道)에 속한 역으로 요안역(遙安驛)으로 불렸고, 조선시대에 들어와 연원도 소속이 되었다. 주의 서쪽 15리에 있었으며, 원래 음성에 속해 있었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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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충주시 신니면에 속하는 법정리. 용안리에 역참이 있던 마을이라 하여 용원(龍院)이라 불렸다. 옛날 한양에서 내려오는 영남대로의 길목으로서 북쪽의 노은면과도 통하는 용원삼거리에 자연 마을이 형성되었다. 이 지역은 개경 또는 한성에서 영남으로 통하는 길목으로 죽산·장호원 등에서 차령산맥을 넘어와 머무는 역원인 용안역(用安驛)이 있었으며, 『여지도서(輿地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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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충주시 신니면 용원리 외룡마을에 있던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의 역원 터. 용원리 외룡마을이 원터로서, 용안(用安)역, 용안(龍安)역, 용원역 등으로도 불렸다. 고려시대 이후 충주에서 서울로 갈 때는 이 역을 통과해야만 하였다. 『여지도서(輿地圖書)』 충원현(忠原縣) 역원의 기록에 의하면 노(奴) 103명, 비(婢) 81명, 대마(大馬) 2필, 기마(騎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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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계 주민들이 매년 정월 9일 당고사를 모시는 부흥당은 목계에서 원주로 가는 길가에서 봉제산(부흥산) 쪽으로 가파른 계단을 30m쯤 올라가면 있다. 단칸 목조와가(木造瓦家)로, 그 규모가 크지는 않다. 아마도 위쪽에 바위가 있어 넓은 터를 만들 수가 없었기에 그렇게 된 것 같다. 올라가면서 오른쪽 바위틈에도 약간의 제물을 차리고 치성을 드릴 수 있는 곳이 마련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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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기농 영농조합 법인인 장안농장의 대표 유근모 사장은 시인이다. 열 명의 농부가 천만 명으로 늘어나기를 바라며 농사를 짓는 그는 아직도 문청(文靑)의 모습을 보이기 때문이다. 장안농장 홈페이지인 http://www.ssamnhub.com에 나오는 그의 귀농일기를 보면 그는 아직도 시인이기를 지향한다. 농장일로 바쁜 가운데서도 이렇게 기록을 남기려는 의지는 유기농 채소에 대한 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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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충청북도 충주 출신의 문신. 본관은 문화(文化). 자는 남로(南老), 호는 농암(聾庵)·농객(聾客). 할아버지는 대사간을 지낸 유상재(柳尙載), 아버지는 통덕랑에 오른 유봉정(柳鳳庭), 어머니는 김징(金徵)의 딸이다. 아들로 유동휘(柳東暉)가 있다. 1694년(숙종 20) 충주에서 태어난 유수원(柳壽垣)은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여의고 한성(현 서울)의 친척 집에서 자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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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충주 지역에서 활동한 현대조각가. 유영교는 충주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홍익대학교 조소과에 입학하여 재학 시절부터 두각을 나타내었다. 1973년 홍익대학교 대학원 조소과에 입학하여 1976년에 졸업하였다. 1969~1977년 서울 동구여자고등학교, 서울 명지고등학교에 재직하였다. 1976년 이은기와 결혼한 후 재직 중이던 명지고등학교를 사직하고 1978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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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충주시 단월동과 풍동을 연결하는 달천 위에 있는 다리. 단월동 상수도 수원을 취수하는 근처 마을을 유주막이라 하여 마을 이름을 따서 유주막다리라 하였다. 유주막은 삼남대로의 문경새재를 넘어 충주로 들어오는 길목이었던 관계로 주막이 발달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400여 년 전 선조의 사돈인 월봉공이 이류면 문주리 팔봉으로 낙향을 했기 때문에 그의 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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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28년(인조 6) 인조반정에 불만을 품은 충청북도 충주 출신 유효립 등이 광해군을 상왕으로 삼고 인성군 이공(李珙)을 국왕으로 옹립하려다 실패한 역모 사건.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권력에서 밀려난 대북파 잔존 세력인 유효립(柳孝立) 등은 정묘호란의 패배, 군적법(軍籍法)과 호패법 시행 등으로 민심이 동요하자 이를 기회라고 판단하였다. 이에 계룡산 천도설 등의 비결(秘訣)을 활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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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충주 지역에서 국가가 위급할 때 백성이 스스로 조직했던 자위군. 의병은 어떤 특정한 시기에 국한되는 개념이라기보다는 우리 역사의 전 시기에 걸쳐 외침이 있을 때마다 일어났던 민병대를 포괄적으로 지칭하는 개념으로 이해된다. 하지만 용어가 같다는 이유로 삼국시대부터 고려와 조선을 거쳐 한말 의병전쟁에 이르기까지 쉼 없이 일어났던 다양한 성격의 의병이 동일하게 이해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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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제 이장 박용기(46세) 씨는 현재 다섯 가지의 일을 하고 있다. 마을의 이장이고, 농요보존회 총무이고, 운봉박씨 충주파의 총무이고, 정미소의 주인이고 농사를 짓는 농군이다. 정미소와 농사일은 가업이니 어쩔 수 없이 해야 하지만, 마을일, 농요보존회의 일, 종친회의 일은 좋든 싫든 맡게 된 일이다. 그가 이렇게 많은 일을 하게 된 것은 사실 그의 능력 때문이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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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충주목사를 역임한 문신.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문숙(文叔), 아버지는 병절교위(秉節校尉)를 지낸 이여연(李汝淵)이다. 이국헌은 1660년(현종 1) 증광시 생원진사시에 합격하였다. 1681년(숙종 7) 금산군수로 재직하며 선치(善治)하여 포상을 받았으며, 1691년(숙종 17) 충주목사로 있으면서 주치(州治)에서 6~7리 떨어져 있는 의창(義倉)인 양진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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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충주시 중앙탑면 탑평리 충주박물관에 있는 조선 중기 공신도감에서 이수일에게 발급한 공신녹권. 이수일(李守一)[1554~1632]은 1624년(인조 2) 이괄(李适)이 난이 일어나자 평안도병마절도사로 부원수를 겸해 안현(鞍峴)에서 반란군을 무찌르고 서울을 수복하였다. 이 공으로 1625년 진무공신 2등에 책록되고, 계림부원군(鷄林府院君)에 봉해졌다. 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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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 충주판관을 역임한 문신. 본관은 덕산(德山). 호는 영재(靈齋). 아버지는 참지의정부사 이조(李慥)이다. 이익박은 황희(黃喜)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1422년(세종 4)에 홍천현감(洪川縣監)을 거쳐 1427년에 충주판관이 되었다. 판부사(判府事) 변계량(卞季良)의 아내가 친정으로 가는 길에 충주를 지나는데 마을 사람 백운흥 등이 작당하여 그 종인(從人)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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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28년(영조 4) 3월 이인좌 등이 정권 탈취를 기도하며 충청감영을 공격하면서 일어난 사건. 숙종 말년 소론은 세자(경종)의 왕위 계승을 지지한 반면, 노론은 경종이 즉위한 뒤 숙종의 유명(遺命)이라는 이유로 경종의 뒤를 이을 인물로 연잉군(영조)을 지지하였다. 특히 경종이 젊은데도 노론 측은 경종이 병이 많고 아들이 없다는 이유로 연잉군의 세제 책봉과 대리청정을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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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주 출신이거나 충주 지역과 연관이 있는 사람을 ‘충주 사람’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충주는 국토의 중심이었고 예부터 사통팔달의 도시였기에 많은 인물이 배출되었다. 또한 충주 지역 자체에서 인물이 잘 성장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격려하는 풍토가 조성되어 있었음도 한 몫을 한 것으로 여겨진다. 다른 고장과 비교하여 손색이 없는 면면을 지녔기에 충주를 인물의 고장이라 칭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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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년에서 1945년까지 일본제국주의에 의한 식민 통치가 지속되었던 시기의 충청북도 충주의 역사. 1910년 8월 한국병합이 체결됨에 따라 일제의 조선 침략이 완성되었다. 일제는 종래의 통감부를 폐지하고 더 강력한 통치기구인 조선총독부를 설치하여 1910년 10월부터 한반도에 대한 구체적인 식민지 지배에 들어갔다. 이때부터 시작되는 조선총독부의 한반도 지배정책은 시대에 따라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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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충청북도 충주 출신의 무신. 본관은 평택(平澤). 충민공 임경업의 6세손으로, 증조할아버지는 증사복시정 임시망(林時望)이고, 할아버지는 참봉 임정좌(林廷佐)이다. 아버지는 증호조참판 임강원(林綱遠), 어머니인 비안박씨(比安朴氏)는 박정혁(朴廷爀)의 딸이다. 1783년(정조 7)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이 되었고, 1784년 정조가 참석한 활쏘기 시험에 참석하여 6품직에 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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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충주 출신의 서양화가. 임직순은 1936년 도일하여 1940년 일본미술학교 유화과에 입학하여 임무(林武)[전 일본대학교 교수] 고야진실(高野眞實)에게 지도받았다. 1940년 일본미술학교 재학 중에 제19회 선전(鮮展)에 「정물(靜物)」을 출품하여 입선하였다. 1941년 제20회 선전에 다시 입선하였다. 1943년 귀국했고 8·15 해방 후 서울여자상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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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조선을 침입한 왜군과 충청북도 충주 지역에서의 전쟁 1592년 4월 13일에 일본군이 부산포에 상륙함으로써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부산포에 이어 동래를 점령한 일본군은 세 길로 나누어 진격하여, 상주 전투에서 이일(李鎰)을 격파하고 충주에서 신립(申砬)을 깨뜨린 뒤 이렇다 할 전투도 치르지 않고 서울을 점령하였다. 이에 선조는 의주로 피난가고, 조선은 7년 동안 일본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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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충주 출신 소설가 염재만이 방황하는 청년들의 자아세계를 다룬 단편소설. 「반노」의 작가로 알려져 있는 소설가 염재만은 충청북도 충주 출신의 작가이다. 「자기 상실」은 발표 연대를 정확히 알 수 없는 그의 단편소설이다. 대표작인 「반노」는 한국문학사상 최초로 성(性) 묘사 수위에 대한 검열 논란에 휘말려 한때 화젯거리가 되기도 하였다. 작가는 이에 진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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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충주시 중앙탑면 봉황리와 하구암리, 용전리를 연결하는 고개. 충주 장미산성과 이웃하고 있어, ‘성(城)’을 뜻하는 우리말 ‘잣’을 붙여 고개 이름이 되었다고 여겨진다. 절골산[341m]과 장미산[337m] 사이에 있는 고개로 남한강 서쪽에 이웃한 을궁산[394m]·장미산[337m]에 이르는 동서 산줄기에 남북 방향의 구조선이 지나가면서 상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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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충청북도 충주 지역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본관은 영일(迎日). 호는 지산(志山). 아버지는 정운한(鄭雲漢)이다. 정원택은 1911년 김교헌(金敎獻)·김유근(金柳瑾)을 만나 대종교(大倧敎)에 입교하고 만주로 망명하였다. 1913년 상해로 건너가 신규식(申圭植)이 이끄는 동제사(同濟社)에 가입하여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 1918년 파리강화회의에 참석할 사절단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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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충주 지역에서 활동한 학자이자 교육자. 정인보는 서울에서 태어났다. 조선 명종 대의 대제학인 정유길(鄭惟吉)의 후손으로, 철종 대의 영의정 정원용(鄭元容)의 증손인 장례원부경과 호조참판을 역임한 정은조(鄭誾朝)의 아들이다. 30여 년을 대학 강단에서 보내며 실학, 양명학, 역사학 등을 후학들에게 지도하였고, 높은 학덕으로 존경받았던 학자이자 교육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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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충주 출신의 서예가. 정태오는 어린 시절 서당에서 한학과 서예를 배웠는데, 당시부터 서예에 소질이 뛰어나 배일 사상이 강한 유학자였던 효제(曉齊) 최한구(崔翰求)에게 전통적 수련 방법으로 서예를 익히게 되었다. 그 후 청년기에는 농사에 전념하였으며, 해방 후에는 사회 운동에도 참여하였다. 재직하던 검찰청에서 퇴직한 정태오는 서울에 있는 동양문화연구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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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충주시 동량면 하천리에 있는 고려시대 절터. 정토사지에는 보물 제17호인 충주 정토사지 법경대사탑비(忠州 淨土寺址 法鏡大師塔碑)가 위치하고 있었다. 정토사와 관련된 문헌 기록은 많지 않다. 그러나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과 『충청도읍지(忠淸道邑誌)』에 약간의 기록이 남아 있어 사찰의 연혁을 살피는 데 도움을 준다. 『신증동국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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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수(烽燧)는 낮에는 연기, 밤에는 불빛으로 가장 빨리 변방의 소식을 중앙으로 전달하던 통신 수단이었다. 30여 리를 기준으로 서로 잘 보이는 산봉우리에 봉수대를 쌓고 횃불과 연기를 올리는 중요한 시설이었다. 봉수제도가 처음 시작된 것은 삼국시대부터 실시되었지만 고려시대에 와서 체계적으로 정비되었고 조선 세종 때에 봉수대 시설과 봉군의 신분, 봉수의 노선을 구분하여 조선 봉수의 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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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충청북도 충주 지역과 경상도를 잇는 주요 교통로였던 고개. 충청북도 괴산군 연풍면과 경상북도 문경 사이에 있는 고개로서, 조선시대까지만 해도 서울과 동래(부산) 사이를 연결하는 교통로였고, 군사적으로도 요충지였다. 조령은 제1관문, 제2관문, 제3관문이 있으며, 이들 관문과 성벽은 1708년(숙종 34)에 축조되었다. 이 중 제3관문을 지나면 경상북도이다. 추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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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92년에서 1910년까지 조선왕조가 지속되었던 시기의 충청북도 충주 지역 역사. 조선시대 충주는 1395년(태조 4) 지방제도가 개편된 후 충청감영의 소재지이면서 목(牧)으로서 대원(大原)·예성(蘂城)으로 불렸다. 관내의 호수는 1,871호이며, 인구는 7,452명에 이르고, 시위군 440명과 선군(船軍) 465명이 있는 대읍이었다. 1458년(세조 4)에 충주진(忠州鎭)이 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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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충주시 신니면 모남리에 있는 천주교 청주교구 주덕성당 소속 천주교 교회. 신니면 모남리는 충주시의 가장 서쪽에 있는 음성군과의 접경 지역으로 예부터 목고개를 넘어 서울로 가는 충주의 관문이다. 따라서 충주 지역 천주교의 전래 경로를 보면 중부 지역 천주교 본령인 감곡성당의 영향을 가장 먼저 받아 천주교 신자들이 생겨난 곳이기도 하다. 1959년 주덕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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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충주시 주덕읍 신양리에 있는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 소속 교회. 선교 사업을 수행하고, 하느님의 복음을 전하여 어려운 이웃을 위한 양로, 보육, 아동복지, 장학 사업을 시행하기 위하여 설립되었다. 1948년 11월 24일 최용복 집에서 예배를 드린 것이 모태였다. 1949년 3월 23일 대한예수교장로회 제4회 충북노회에서 설립인가를 받았다. 1960년 2월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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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충주시에 있는 중등 보통 교육 담당 기관. 중학교는 수업 연한이 3년이고 초등학교에서 받은 교육의 기초 위에 중등 보통교육을 실시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1969년 서울부터 중학교 무시험 입학제가 실시되어 1971년 전국으로 확대되었다. 1980년대 이후 국민교육 이념이 강조되면서 중학교 의무교육제도를 추진하는 바탕이 되었는데 1985년 도서·벽지 지역을 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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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흥왕은 재위 12년째를 맞은 551년에 나라를 새롭게 열겠다는 의지로 연호를 ‘개국(開國)’으로 고친다. 개국의 의지를 실천하여 신라의 중흥을 이룩한 진흥왕의 일대 사업은 국경 지대의 요충인 낭성(娘城) 순수에서 우륵의 신가(하림조)를 접한 이후부터 시작된다. 따라서 진흥왕과 우륵(于勒)의 만남에는 어떠한 수수께끼가 있음이 분명하다. 다음은 『삼국사기(三國史記)』에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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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7년(순조 17) 충청북도 충주 출신 채수영이 일으킨 역모 사건. 1802년(순조 2) 김조순(金祖淳)의 딸이 왕비로 책봉된 뒤 1804년 정순왕후가 죽자 순조의 장인 김조순은 비변사를 비롯하여 조정의 권한을 장악하였다. 이로부터 안동김씨 세력의 세도 정치가 실시되었으며, 이로 인해 부정부패가 만연하여 뇌물 거래가 공공연히 이루어지고, 수령들은 백성들을 더욱 수탈하였다.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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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충주시에서 활동하는 동학 계열의 신종교. 1860년 최제우(崔濟愚)에 의해 창도된 후 1905년 제3대 교주 손병희가 동학의 재건을 위해 교명을 천도교로 바꾸었다. 1906년 ‘천도교 대헌’을 반포하고 서울에 중앙총본부를 두고 지방은 72개 대교구로 분할했다. 1961년 천도교 경전을 간행했으며, 1962년 사회 단체로 등록하였다. 현재 천도교 중앙총부는 서울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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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나 못해. 할 말두 읎구 …” 토산품 공동판매장 할매집을 찾아 갔을 때 처음 보인 반응이다. 머리를 깨끗하게 뒤로 벗어 넘겨서인지 깔끔하면서도 인상이 강하다. 짐작했던 성격대로다. 누구 앞에서도 당당할 자세이다. 허나 조금 얘기를 나누다 보니 참 여리다. 마음이 곱다. 억지로 감추려다 보니 강해 보일 뿐이었다. 최재희 씨는 본래 안동이 본가란다. 자세한 얘기는 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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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충주 지역에서 음력 8월 15일에 지내는 명절의 하나. 농경사회에서 유래된 추석은 우리 고유의 명절로 충주 지역에서는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중추절 또는 한가위라고도 한다, 중추절은 가을을 초추(初秋, 7월), 중추(中秋, 8월), 종추(終秋)로 불린 데서 붙여진 이름이고, 한가위란 8월 중에서도 가장 크게 한가운데 있다는 뜻이라고 한다. 추석은 한 해의 농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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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계 정류장에서 남쪽으로 난 길을 따라가면 목계1리 구회관이 나온다. 여기서 뚝방 길을 따라 더 가면 새터가 나온다. 이곳에는 외지인의 별장도 있는데, 조일상 씨의 집이 여기에 있다. 물론 별장 건물은 아니다. 미리 연락을 하고 찾아가니 기다리고 계셨다. 목계마을과 관련된 여러 가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먼저 조일상 씨가 부흥당 당고사의 축문을 쓰게 된 연유를 물어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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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충주시 주덕읍 삼청리에서 산척면 석천리까지 연결되는 철도. 충북선은 조치원~봉양간에 설치된 철도로 1958년 12월 31일 완전히 개통되었으며, 길이 129.2㎞였다. 1980년 복선으로 개통되면서 선로를 직선화하여 길이가 113.2㎞로 짧아졌다. 충주시 구간은 주덕읍, 대소원면, 용관동, 봉방동, 금릉동, 목행동, 동량면, 산척면 등을 지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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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충주시 신니면 견학리에 있는 삼국시대 판축 토성. 충주 견학리 토성은 낮은 구릉지역의 끝자락에 축초된 토축성으로 규모가 작은 판축 공법이 적용되었다. 1991년과 2000년 충북대학교 박물관에 의해 2차례에 걸쳐 발굴조사 되었으며, 이를 통해 9세기를 전후한 시기의 특징적인 양상이 확인되었다. 또한 청동기시대의 문화층과 초기 철기시대와 원삼국시기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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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충주시 동량면 하천리 정토사지에 있던 고려 전기 홍법국사 탑비. 홍법국사는 통일신라 선덕왕대에 태어나 12세의 나이에 출가하였고, 당나라를 다녀온 뒤 선(禪)을 크게 일으켜 국사 칭호를 받았다. 시호를 홍법, 탑명을 실상(實相)이라 하였다. 정토사에 머물다 입적하자, 고려 목종이 시호를 홍법, 탑명을 실상(實相)이라 내려주러 탑비를 건립하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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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충주시 엄정면 추평리 사지에 있는 고려 전기 삼층석탑. 충주 추평리 삼층석탑은 사찰 가람의 필수적인 조형물이었다. 고려시대 들어와 불교가 국교로 신앙되면서 전국을 중심으로 많은 사찰이 창건되고 이와 함께 석탑이 건립되었다. 추평리 사지에서 가까운 지점에는 백운사·억정사지 등이 위치하고 있어 이들 사찰들과 함께 고려시대 불교 신앙의 중요한 역할을 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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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 문신 김종직이 충주 지역에 있던 국원성의 경영루를 보고 지은 한시. 김종직(金宗直)[1431~1492]의 자(字)는 계온(季昷), 호는 점필재(佔畢齋)이다. 성리학자로 학문과 문장이 뛰어나며, 영남학파(嶺南學派)의 종조(宗祖)로 추앙받고 있다. 저서로 『점필재집(佔畢齋集)』이 있다. 칠언율시로 구성되었다. 진한 천년의 국원성에(辰韓千載國原區) 다시 층루가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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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충주시 호암동 있는 공립 방송통신 고등학교. 과학 기술의 발달과 경제·사회 및 문화적 여건의 급속한 변동에 따라 유능한 직업인을 양성하며, 경제적 여건 등으로 일반 고교에 진학하지 못한 교육 대상자에게 고교 교육 기회를 제공하고, 평생 교육의 이념을 확산 및 정착시켜 나감으로써 국민 교육 수준을 향상시켜 국가 발전에 이바지할 수 있는 인재 양성을 교육목표로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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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2년 11월 3일 북한 공비의 습격과 방화로 충주군청이 불탄 사건. 1950년 6월 28일 북한군은 소련제 탱크를 앞세우고 서울을 점령한 후 계속 남진하여 7월 초 충주를 함락하였다. 북한군은 여세를 몰아 낙동강 전선에서 총공세를 폈다. 1950년 9월 15일 유엔군 사령관 맥아더 장군이 인천상륙작전을 성공하여 9월 28일 서울을 수복하고, 그해 10월 1일 유엔군과 한국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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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의 대몽항쟁은 1231년(고종 18)부터 1273년(원종 14) 삼별초군의 패망에 이르는 40여 년이란 장구한 기간 동안 전개되었다. 1225년(고종 12) 몽고 사신 저고여(著古與)의 피살 사건을 계기로 국교가 단절된 뒤, 몽고는 1231년(고종 18) 조공 거절 및 저고여 피살에 대한 보복으로 고려에 대한 제1차 침입을 필두로 1254년까지 8차에 걸쳐 한반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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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주 지역은 우리나라 3대 철산지의 하나로 고대부터 철광산이 개발되어 철광석을 캐고, 쇠를 뽑고 녹이고 두드려 각종 무기나 농구 등의 연모를 만들던 쇠부리업이 발달했던 곳이다. 고대 국가의 힘의 상징인 철을 확보하기 위해 삼국은 공히 충주 지역에 공을 들였으며 충주 지역을 확보한 국가가 항상 강력한 힘을 발휘하였다. 충주는 질 좋은 철을 생산하던 자원의 보고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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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주댐은 충주시 종민동과 동량면 조동리 사이의 협곡을 막아 세운 다목적 댐이다. 충주시 동북방 6㎞ 지점에 높이 97.5m, 길이 464m로 건설된 국내 최대의 콘크리트 댐이다. 소양강댐에 이어 2번째로 많은 27억 5,000만t의 저수 능력을 갖추어 연간 33억 8,000만t의 각종 용수를 수도권 지역에 공급하고 홍수 조절 기능도 하고 있다. 충주댐으로 인하여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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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충주시 용두동·용관동·단월동·칠금동·달천동에 있는 방울토마토 생산 및 수출 단지. 충주방울토마토작목회를 통해 방울토마토를 생산·출하하는 단지로 협업적 농업 경영을 통해 생산성을 높이고 방울토마토의 공동 출하 및 가공·수출 등을 통해 충주 지역의 소득 증대를 목적으로 2000년에 지정되었다. 재배 면적은 36.4㏊이며, 충주시의 지원으로 선별기 3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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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후기부터 조선 중기까지 충청북도 충주 지역에 왕실의 중요한 서책과 문서를 보관하였던 창고. 충주는 역사상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관방(關防)으로서 중요한 요충지이고 한강의 수운(水運)을 이용한 교통의 요지였다. 이 때문에 외적의 방어에 용이하고 교통이 편리하며 내륙 깊숙이 위치한 도시인 점이 고려되어 사고(史庫)가 설치되었다. 사고 관리는 충청도관찰사와 충주목사의 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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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충주시 성내동에 있는 사회 봉사 단체. 생명의 전화 국제위원회 헌장과 한국생명의 전화 전국위원회 규정에 따라 전화 상담을 비롯한 기타 필요한 사회 복지 사업을 수행하기 위해 설립되었다. 1983년 12월 1일 서울과 부산에 이어 전국에서 3번째로 설립 인가를 받아 충주생명의 전화를 개통하였다. 1984년에는 제2기 상담원 30명과 제3기 상담원 20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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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6년 충주성에서 제천 의병과 관군·일본군 사이에 있었던 전투. 1894년 6월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을 국가의 존망이 걸린 위기로 인식한 유생들은 관군과 일본군에 맞서 의병을 일으키고 반침략 운동과 반개화 운동을 전개하였다. 조선에 대한 일본의 침략은 1895년 8월 20일 을미사변을 도발하면서 한층 노골적으로 진행되었다. 국모 시해에 항거하여 ‘국수보복(國讐報復)’을 기치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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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북부에 위치한 시. 충주시는 중부 내륙 광역권의 거점 도시로 수도권에 인접해 있고 풍부한 용수로 기업하기 좋은 산업 기반이 구축된 도시이다. 국토의 중앙에 위치한 전국 교통망의 중심이며, 남한강 유역을 중심으로 한 중원 문화의 중심 도시이자, 충주호와 월악산, 수안보온천·앙성온천·문강온천이 있는 국제적인 관광 도시이다. 충주시를 상징하는 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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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충주시 성내동 일대에 있던 조선시대 읍성. 충주읍성은 1866년(고종 3) 병인양요를 치른 뒤 전국의 성첩과 군기를 보수하고 대오와 군저를 확장하고 포수를 배치하여 유사시에 대비하라는 명을 받고, 1869년(고종 6) 2월 충주목사 조병로(趙秉老)가 읍성을 개축하여 10개월 만인 11월에 완성하였다. 이때 개축된 성의 둘레가 3950척, 두께 25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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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56년(고종 43) 4월 충주주성에서 고려군과 몽고군 사이에 있었던 전투. 고려와 몽고가 처음 접촉한 것은 1219년(고종 6) 고려가 강동성(江東城)에 있는 거란족을 평정할 때 몽고의 후원을 얻어 공동 작전을 취했을 때이다. 이 일을 빌미로 이후 몽고는 고려에 대한 은인을 자처하며 사신을 보내 막대한 공물을 요구하였다. 1225년(고종 12) 1월 몽고의 사자 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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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충주중학교 설립을 위해서 충청북도 충주 지역에 조직되었던 후원회. 1938년 6월 충주 지역 유지 유석희(劉錫禧) 등 10여 명이 도지사에게 충주중학교 설립을 요청하였을 때 건설비 20만 원을 모금하면 설립을 인가한다는 답변을 받았다. 이에 유지들은 군민대회를 열고 즉석에서 충주중학기성회를 조직하였다. 모금 활동 결과 1939년 4월 기부 총액이 약 12만 원에 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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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충주시 직동에 있는 남산 등에서 발원하여 시가지의 중심부를 지나 탄금대 서쪽에서 달천으로 흘러드는 하천. 충주시가의 중심부를 흐르는 하천이어서 충주천이라 부르게 되었다. 길이 10.50㎞이며, 교현천과 함께 충주시가지를 흐르는 중요한 하천이다. 충주분지를 남동~북서로 관통하며 흐르면서 구릉대와 달천평야 곳곳에 충적지를 만들고 있다. 상류는 남산과 대림산 일대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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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충청북도 충주 지역에서 활동했던 학생 단체. 충주 출신 유학생들의 친목 도모와 충주 지역민들의 계몽과 민족의식 고취를 목적으로 1925년 서울에서 유학하던 충주 출신 유학생들을 중심으로 조직되었다. 1925년 7월 여름방학을 이용하여 충주 지역 순회 강연회를 개최하였다. 일정은 7월 28일 신니면 용원리, 7월 29일 노은면, 7월 30일 대소원(현 이류면 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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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충주 지역에서 배출된 충신, 효자·효부, 열녀의 총칭. 충주에는 많은 충신들이 있다. 1760년(영조 36)에 편찬된 『여지도서』에는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활약한 백기당(白旗堂) 조웅(趙熊)을 비롯한 4명이 기록되어 있으나, 『조선환여승람』에는 11명,『충주시지』에는 11명이 기록되어 있다. 충주 출신으로 나라와 향리에 헌신한 인물들이 많이 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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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충청북도 충주시 칠금동 남한강 가에 있던 나루. 한강의 수운은 강원도 영월에서 서울의 용산이나 마포까지이며 그 중심에 충주가 있다. 충주에는 고려시대 때 덕흥창, 조선시대 때 가흥창이 있어 한강의 물길을 이용하여 세금으로 받은 곡식 등의 물품을 수송하였고, 조선 후기 상업이 발달하면서 사선(私船)에 의한 경강상인들이 한강을 오르내리며 장사를 하였다. 이때 경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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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충주시 칠금동과 중앙탑면 창동리 갈마 입구를 연결하는 다리. 충주의 대표적인 명승지인 충주 탄금대 주변에 있어 그 이름을 따서 탄금대교라 하였다. 탄금대교는 왕복 2차로로 길이 343m, 폭 8.5m, 유효 폭 7m, 높이 9m이다. 경간 수는 16개로 탄금대 방향을 1경간으로 할 때 경간장의 경우 1~6경간은 18m, 7~13경간은 25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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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충주시에서 생산되는 특별한 생산물. 충주 지역의 특산물로는 충주 사과와 복숭아, 황색엽연초, 고구마, 고추, 밤, 쌀, 애플마, 그리고 중원 청명주와 사과주 등이 있다. 1912년 재배되기 시작한 충주 사과는 다른 생산지에 비해 일교차가 크고 일조량이 풍부하여 빛깔·당도·향기에서 으뜸을 차지하고 있는 충주의 대표적인 특산물이다. 또한 황색엽연초는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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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양오행설을 기초로 충청북도 충주 지역의 땅에 관한 이치를 설명하는 이론. 풍수지리란 산의 배치와 물의 흐름, 지형과 방위, 하늘과 땅의 기운 등을 고려하여 인간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일을 하는 것이다. 풍수지리는 과거 역사 속에서 삶의 터전을 만들어 가는 데 있어 중요한 기준으로 활용되었다. 충주 지역의 풍수지리는 삼국시대부터 언급되고 있으나 자연과 사람을 연결시켜 비교적 자세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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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충주 지역의 육지 표면에서 일정한 유로를 가지는 유수의 계통. 충주 지역에는 태백에서 발원하여 정선·영월·단양·제천을 지나 충주·여주로 흘러나가는 남한강이 중앙부를 관통하고 있다. 남한강은 북한강과 함께 한강의 2대 지류로서, 태백에서 양수리까지 약 400㎞를 흘러가는 큰 하천이다. 또한 탄금대 부근에서는 남한강의 제1지류인 달천이 합류하면서 넓은 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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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충주시 동량면 손동리와 하천리를 연결하는 다리. 동량면 하천리 마을의 이름을 따서 하천교가 되었다. 길이는 300m, 폭은 7.5m, 유효 폭은 6m, 높이는 36m이다. 경간은 각각 50m의 3경간 연속 강판형교로서 총 6개로 되어 있다. 차선은 2차선으로 설계하중 DB-18로 하여 2등교로 설계되었으며, 난간은 좌측·우측에 방지턱을 50㎝, 폭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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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계별신제는 충청북도 충주시 엄정면 목계리 지역에서 행해졌던 굿놀이를 말한다. 1940년대 중반까지 연행되다가 현재는 전승이 중단된 상태로 그 이름을 빌어 일부 재연 행사를 하고 있다. 본래 무당이 주재했기 때문에 목계별신굿이라는 명칭이 적합하겠지만, 현재는 별신제로 많이 칭하고 있어 목계별신제로 불러도 무방하다. 목계별신제는 목계 지역에서 행해진 목계 줄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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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충주시 용탄동에 있는 한국수자원공사 산하 충주 지역 관리단. 한국수자원공사 충청지역본부 충주권관리단은 1985년 10월 완공된 충주댐의 운영 관리와 충청북도 중서부 지역과 경기도 남동부 지역의 도시화와 산업화에 따른 생활용수 및 공업용수의 안정적 공급을 도모하기 위해 설립되었다. 1979년 산업기지개발공사 충주다목적댐건설사무소로 처음 개소하였다.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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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충주시 대소원면 첨단산업에 있는 의약품 생산공장. 한국팜비오는 요로결석 치료제, 소화제, 담석증 치료제, 요석 치료제 등 전문의약품 생산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는 유망 벤처기업이다. 본사는 서울특별시 강남구 양재동에 소재하고 있으며, 충주시 대소원면 첨단산업단지에 공장을 두고 있다. 한국팜비오 충주공장에서는 국내 최초로 요로결석 치료약을 개발하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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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충주 지역에만 전수되는 조리법으로 만든 토속 음식. 향토음식은 충주에서 많이 생산되거나 타 지방으로부터 많이 공급받을 수 있는 재료를 사용하여 적합한 조리법에 의해 발전시킨 음식을 말한다. 각지 어디에나 있는 흔한 재료를 사용하더라도 조상들의 생활 형태·기후·풍토 등 지역적 특성이 반영된 특유의 조리법이나 타 지방과 차별적으로 발전한 가공 기술을 이용하여 발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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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8월 15일 이후부터 현재까지 충청북도 충주 지역 역사. 1945년 8·15해방은 우리 민족에게 커다란 환희와 함께 혼란과 고통도 가져다주었다. 충주도 해방 후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좌익과 우익의 대립이 노정되면서 많은 대립과 갈등이 야기되었다. 좌익과 우익의 갈등 결과, 남북이 분단되었으며, 북한은 6·25전쟁을 일으켜 500만 동족을 사상하였다. 충주는 우리나라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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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호적대장에 기재된 충청북도 충주 지역의 호와 인구 수. 호구는 사전적 의미로 호적대장에 기재된 집과 식구의 수를 말한다. 호구를 정확하게 파악하는 것은 국역 복무자와 공부(貢賦) 부담자를 확정짓고 대민정책을 수립하는 데에 필수적이기 때문에 조선 정부에서는 정확한 호적대장을 마련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조선시대의 호적대장은 조선 정부가 국가정책 수행이라는 특정한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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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충주시에서 육지에서 주변에 비해 지대가 낮아 물이 고인 공간. 한반도에서 비단 충주 지역만 내륙에 호수가 많은 것은 아니다. 주요 대하천을 끼고 있는 지역, 그 중에서도 산간 계곡을 굽이굽이 흘러오다가 급격히 하곡이 넓어지기 시작하는 변환점에서는 대부분 대형 다목적 댐과 넓은 인공 호수가 조성되어 있다. 북한강 유역의 춘천(소양강댐·춘천댐), 낙동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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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충주 출신의 소설가. 홍구범은 용원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 중동중학교를 중퇴하였다. 1946년 김동리, 조연현과 함께 청년문학가협회 회원으로 활동하며 순수문학 계열의 소설 창작을 주로 했다. 1947년 『백민』 8호에 소설 「봄이 오면」으로 등단한 후, 1940년대 말 활발한 작품 활동을 벌여 화제작 제조기라는 명성을 얻기도 했다. 1949년 모윤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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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충주시 주덕읍 당우리에 있는 홍기원의 공덕을 기리는 비. 홍기원이 고향 후세들을 위하여 사립학교 터를 희사함에 그 뜻을 기리기 위하여 마을 주민들이 1994년에 홍기원 송덕비를 세웠다. 주덕읍에서 국도 3호선을 따라 서울 방향으로 가다가 당우리 쪽으로 우회전한 후 원당우 사거리에서 직진하면 유동 마을회관이 나온다. 그 입구에 비가 세워져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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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충주 출신의 교육자이자 육영사업가. 홍성태는 홍형표의 독자로 태어나 7세에 아버지를 따라 서울로 유학하여 1948년 덕수상업학교를 졸업하였다. 1952년 한국대학을 졸업하고 나서 교직에 발을 내딛어 정신여자중학교와 덕수상업고등학교에서 교사로 재직하였다. 이후 귀향하여 지역 문화 창달을 위해 노력하다 사재를 투자하여 1956년 앙성학원을 설립하였다. 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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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충청북도 충주 출신의 효자. 본관은 풍산(豊山). 자는 양여(養汝). 모당 홍이상(洪履祥)의 후손이다. 증조부는 첨지중추부사 홍만최(洪萬最), 조부는 홍문관교리 홍중현(洪重鉉), 아버지는 홍인보(洪寅輔)이고, 어머니는 수원최씨이다. 홍차기(洪此奇)가 태어나기 전에 아버지 홍인보는 살인범의 누명을 쓰고 옥살이를 하고 있었다. 어머니 수원최씨는 홍차기가 열 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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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1년에 간행된, 충주 출신의 시인 박재륜의 다섯 번째 시집. 어머니를 여의고 70세를 넘어서면서 습작해 온 작품과 1958년 발표한 「궤짝 속의 왕자」, 1959년의 「메마른 언어」, 1972년의 「전사통신」, 1978년 「인생의 곁을 지나면서」를 묶어 간행하였다. 남한강변에서의 어린 시절과 서울에서 보낸 20~30대의 생활, 6·25전쟁 후 귀향하여 고향에서 보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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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남기 선생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은 박기서[1932~ ] 씨이다. 1953년부터 지남기 선생과 친교를 맺었으며 1960년대 후반에는 지남기 선생과 함께 마수리 농요를 복원하는데 큰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1972년에는 전국 민속예술경연대회에 참가하여 지남기 선생의 메김 소리를 받기도 하고 후렴구를 부르기도 하면서 마수리 농요를 전국적인 무형문화재로 발전시킬 수 있었다....